백과사전 상세 본문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나 법률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이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의 수용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 단체였다.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최고 학부인 국학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 여전히 남았는데, 이는 화랑도 조직상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眞平王:579~632 재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솔할 책임자로 화주(花主)를 제정한 일도 있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을 뽑았다.
신라시대를 통해서 화랑은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서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화랑도는 위로는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화랑도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화랑도의 조직상의 특징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