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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37년(고종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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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06년(충렬왕 32) |
국적 | 고려, 한국 |
요약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자는 운지(雲之). 아버지는 동지밀직(同知密直) 예(裔)이다. 재상 유경(柳璥)에게 발탁되어 남경유수판관, 광주통판(廣州通判), 충청도·경상도·전라도 안찰사를 역임했다. 이어 호부시랑을 거쳐 1271년(원종 12) 우부승선에 임명되자 왕이 정사를 환관(宦官)들에게 맡기고, 천변(天變)으로 자주 죄수를 석방하는 것 등을 경계했다.
그후 좌승선·승선 등을 지내고, 1278년(충렬왕 4) 지밀직사사로 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이듬해 일본정벌 준비를 위하여 전라도지휘사가 되어 전함을 만들고 군량을 마련하여 합포(合浦:지금의 馬山)로 수송했는데, 농사 때를 잃지 않게 하여 원나라 사신이 그 유능함에 탄복했다. 이후 지첨의부사·도첨의찬성사·첨의찬성사를 거쳐 1294년 첨의중찬에 이르렀고, 이듬해 첨의령을 더하고 치사(致仕)했다. 1296년 다시 우중찬에 임명되어 '편민18사'(便民十八事)를 건의했다. 당시 권세가들의 전민(田民) 강탈이 심해서 사서인(士庶人)들의 불만이 심화되자, 홍자번은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시 사회의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난 폐단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편민18사를 상서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주로 관리의 작폐방지, 공부의 균정(均定)과 정액 이외의 공부수납 억제, 의창(義倉) 등을 통한 백성의 구휼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홍자번이 권문세족 출신이라는 정치적 입장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즉 작폐의 책임을 주로 지방관과 출사원사에게 돌리고 권문세가에 대해서는 은병(銀甁) 등으로 세포(細布)나 능라 등을 강제로 구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정도의 지적에 그치고 있다. 이와 같이 편민18사는 상당히 온건한 개혁안이었다. 하지만, 129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교지를 통해 정부측 입장의 개혁의지를 표출할 때 편민18사가 그 토대가 되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좌복야 참지광정원사(左僕射參知光政院事)가 되었다가 다시 첨의중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벽상삼한진충동덕좌리공신 경흥군 개국후(壁上三韓盡忠同德佐理功臣慶興君開國侯)에 봉해지고 좌중찬에 올랐다. 이후 1300년 판중군사를 더했다. 이무렵 오기(吳祁)·석천보(石天輔)의 이간으로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자, 1303년 삼군(三軍)을 동원하여 오기·석천보를 붙잡아 원나라에 보내는 등 왕 부자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1304년 도첨의좌중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참소를 받아 파직되고, 자의도평의사사(咨議都評議司事)가 되었다.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 등의 이간책동을 진술하고 두 왕을 받들어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 원나라에서 죽었다.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推誠同德翊戴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고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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