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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04, 노르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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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63. 12, 오크니 제도 |
국적 | 노르웨이 |
요약
노르웨이의 왕(1217~63 재위).
(영). Haakon IV Haakonsson. 별칭은 Hkon den Gamle (Haakon the Old),.
왕국의 힘을 강화하고 예술을 장려했으며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 대한 지배를 확립함으로써 중세 노르웨이의 '황금시대'(1217~1319)를 연 왕으로 평가된다. 호콘 3세의 서자이자 유복자이며 노르웨이 스베레 왕의 손자로 알려진 그는 잉게 2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1217년 잉게가 죽자 스베레의 지지자인 비르클레그 부자가 그를 왕으로 선포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그가 호콘 3세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문을 제기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불에 달군 쇠로 사실을 가려내는 신판을 견디어낸(1218) 다음부터 이 의문은 누그러졌다.
통치 초기에는 지주 귀족의 지배에 반대하는 동부지역의 노동자와 부유한 자작농이 봉기를 일으켜 난관에 봉착했다. 봉기를 진압하고 나자 이번에는 그의 손위 친척 스쿨리 보르손 백작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호콘은 그를 무마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그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자 재빨리 군대를 동원해 살해했다(1240). 1247년에 교황의 사절이 그의 대관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그당시 노르웨이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는 왕정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가문이나 종족간의 피의 복수를 금지하는 법과 왕위계승에 관한 법,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1217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무역협정을 맺었는데, 이것은 양국 모두에게서 최초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1250년에 북부 독일의 중요한 무역 도시인 뤼베크와 무역협정을 맺었으며 노르웨이와 러시아 사이의 북부경계선을 확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1261~62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두 식민지는 노르웨이가 무역을 보호해주고 사회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대가로 노르웨이의 지배와 과세를 인정했다. 1263년 그는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가 노르웨이 소유의 맨 섬과 헤브리디스 제도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갔으나,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끝에 오크니 제도로 후퇴해 그곳에서 죽었다. 예술을 장려한 것으로 알려진 호콘은 중세의 로맨스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and Iseult〉를 노르웨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후원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에 많은 프랑스 소설이 노르웨이어로 번역되었다. 그가 죽은 후 아이슬란드의 연대기작가 스툴라 토르다르손(1284 죽음)이 〈호콘 Hákonar saga Hákonarsonar〉이라는 전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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