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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그리스 고전시대의 연속이었다. 수사학은 역시 헬레니즘적 교육의 지배적인 요소였다. 고르기아스·이소크라테스 등 전시대 이론가들의 기본적인 이념은 좋은 말은 좋은 사상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학 교육의 복잡한 조직은 자칫 자화자찬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문체가 화려하고 공허한 형식주의로 기울었다. 그러나 BC 1세기에 로도스 섬에는 건전한 수사학파가 존재해 로마의 위대한 변론가 키케로와 유명한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서는 놀이에 가까운 다양한 재능과 학식이 창조정신보다 중요시되었으며, 언어와 운율이 한층 중요시되었다. 문학과 그 관련 학문이 나란히 발달해 상호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테오프라스토스의 제자이며 10년 동안 아테네 귀족정치의 지배자였던 디미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이라는 연구소를 세울 때 조력했다. 그것은 유명한 도서관과 함께 고전세계에 있어 학자·작가 들의 최대 집합소가 되었으며, 이 두 기관에서 근대 도서관과 대학 및 아카데미가 생겨났다.
BC 3세기의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던 칼리마코스는 이 도서관의 도서목록 책임자였다. 로도스 섬의 아폴로니오스는 장편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 Argonautica〉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호메로스의 전설을 쇄신하려는 시도를 했다. 한편 아라토스는 별에 관한 교훈서사시 〈현상 Phaenomena〉에서 헤시오도스의 전승을 써넣었는데, 이 책은 BC 4세기의 산문으로 된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항해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씌어졌다.
칼리마코스와 기타 시인은 찬가인 에필리아와 특징 있는 헬레니즘적 형식의 단시인 에피그람을 썼는데, 이것은 이미 영웅의 업적에 관한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 풍자시는 BC 100년경까지 성행했으며, 위대한 시인이자 편집자인 멜레아그로스의 사화집 〈스테파노스 Stephanos〉은 이 시대에 생겨났다. 이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시인 테오크리토스는 사실적인 대화체로 씌어진 〈미모스(mimos)〉의 작가이며 〈전원시집 Idylls〉을 저술한 전원시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문학은 독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씌어졌고, 그 요구를 만족시켜야 했다. 또 대중적인 제례나 구경거리는 헬레니즘 세계에 넘칠 만큼 많았는데, 고전극 특히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이 자주 상연되었다. 그러나 연극을 지배한 형식은 새로운 희극이었으며, 여기에는 역시 종래의 등장인물과 습관적인 장면이 수반되었다(→ 신희극). 희극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에게 호소용으로 전락하여 생기 없는 에로티시즘과 비정상적인 개인의 감정에 필요 이상의 흥미를 나타냈다.
상연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종의 극시인 헤론다스의 〈미미암비 Mimiambi〉는 풍자와 외설로 가득 찬 사실적인 대화편이었다(→ 마임과 팬터마임). 로마 제국의 연극 공연물 중 가장 대중적인 형식이었던 팬터마임은 그 기원을 헬레니즘 시대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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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헬레니즘의 교육과 문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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