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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집트 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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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아랍어 |
대륙 | 아프리카 |
국가 | 이집트 |
참고 | 유네스코 세계유산 (1979년) |
요약
나일 강 제1폭포와 옛 아스완 댐 바로 위에 있는 섬.
(아). Jazīrat Fīlah.
이집트 아스완 주의 아스완 시에서 남남서쪽으로 11㎞ 떨어져 있다.
이곳의 옛 이집트 이름은 프알레크였고, 콥트어에서 유래한 필라크('끝' 또는 '먼 곳'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이 섬이 누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섬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관례적으로 쓰는 이름은 그리스어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천일야화 The Thousand and One Nights〉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을 따 크사르아나스알우주드라고도 했다.
크기가 460×150㎞인 충적층으로 덮인 필라이의 화강암 암반은 나일 강이 최고 수위로 범람할 때도 그 위로 솟아 있었으나 1902, 1907년에 아스완 댐이 들어서면서 저수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침수되기 전에 이곳을 보려고 옛 신전과 제단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현재 지명인 자지라트알비르바('신전의 섬'이라는 뜻)라는 이름도 얻었다.
초기 이집트 시대부터 이 섬은 이시스 여신에게 바쳐졌는데, 알려진 최초의 건축물은 쿠시 왕조 25대 파라오인 타하르카(BC 689~664 재위)가 지은 것이다. 알려진 최초의 신전은 사이테스(BC 664~525)가 건축한 것으로서 허물어진 채 발견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건물로 재사용되었다.
30대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넥타네보 2세(BC 360~343 재위)가 지금의 주랑(柱廊)을 증축했다. 이 파라오는 이후 1952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던 통치자 중에서 유일한 본토 출신의 통치자였다. 이시스 신전 복합 건조물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와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완성했다. 그러나 그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BC 27~AD 37) 때 시작한 내부 장식들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이 신전들의 서쪽에 간이 건조물을, 동쪽에 문을 증축했다.
이집트 신들에게 헌사된 또다른 건축물로는 임호테프에 바쳐진 신전과 하토르에게 바쳐진 신전, 그리고 오시리스·호루스·넵티스에게 바쳐진 예배당 등이 있다. 신전은 로마 시대에 계속 번영했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378년부터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통치기(527~565)에는 문을 닫지 않았다. 이시스 여신을 섬기던 사제들은 상(上)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는데 이는 그들이 와디알라키 근처의 금광을 차지하고 있었고 쿠반에 있는 대상로(隊商路) 종착지를 관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바다에 부족과 블레미에 부족이 계속해서 이시스를 섬겼기 때문에 누비아에서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이집트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한편 이집트를 다스린 로마와 비잔틴 통치자들은 연례의식 때 여신의 형상을 빌려주어 이집트 본토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괴롭힌 이들 부족을 관리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임 후기에 이시스 신전은 교회로 바뀌었고, 융성하던 도시 안에 다른 2개의 콥트 교회도 세워졌다.
이 모든 건조물은 옛 아스완 댐 뒤쪽이 부분적으로 침수되기 전에 탐사되고, 증축되었다(1895~96). 그후 1907년 세밀한 검사 결과 장식물의 채색 부분이 염분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 상류 쪽의 아스완 하이 댐의 완성과 함께 신전들이 물 위로 다시 드러났을 때는 제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발견되어 이것들을 근처의 더 높은 곳인 아길키아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필라이의 본모습과 같이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신전들은 어느 정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려 1980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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