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피트나

다른 표기 언어 fitnah

요약 이슬람에서 이단자들의 반란, 특히 내전(수니파와 시아파 사이)과 종교적 분열(시아파들 사이)을 초래한 이슬람 공동체 최초의 주요내분(656~661).
(아랍어로 '시련', '시험'이라는 뜻).

메카의 우마이야 왕조 출신인 제3대 칼리프 우스만(644~656 재위)은 공직임명에서 메카인들인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편애함으로써 마호메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인 메디나의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샀다. 이집트인 병사들이 우스만을 살해한(656. 6. 17) 것에 대해 메카인들이 복수를 요구했을 때 메디나인들이 제4대 칼리프로 선언한 마호메트의 사위 알리가 따르지 않자 반대의 화살이 그에게로 돌려졌다.

알리의 군대가 마호메트의 미망인 중의 하나인 아이샤의 군대와 싸운 낙타 전투(656. 12)에서 마호메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던 탈하와 앗 주바이르가 일시적으로 알리의 입장을 지켜주었으나 결국 내란이 시작되었다. 메카 출신의 또다른 우마이야 왕조의 사람이자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가 우스만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요구를 지지하고, 알리의 칼리프 지위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시핀 전투(657)에서 그들은 맞붙어 싸웠고 아드루흐에서 중재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전투의 결과는 참담했다. 이때문에 알리의 군대는 분열되었고 알리의 추종자들 중 일부(하와리즈)는 오직 신(神)에 의해서만 올바로 결정될 수 있는 사건을 인간이 중재한다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욱이 중재자들이 알리를 정당한 칼리프로 인정하지 않자 그의 지위는 더욱 격하되었다. 그결과 알리의 정치적 동맹자들인 시아 알리(shῑ⁽at ⁽Alῑ : 알리의 당)를 형성시켜 이슬람 내에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야기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알리와 그의 모든 후손들이 신에 의해 마호메트를 계승할 칼리프로 임명되었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발전시켰다. 전투의 결과에 힘입어 무아위야는 이집트를 장악하고 알리의 본거지인 이라크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공공연한 전쟁은 알리가 암살당한 661년에 마침내 끝나고 무아위야가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프로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교 분열은 계속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피트나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