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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다른 표기 언어 피에로 , Piero della Francesca
요약 테이블
출생 1416년경
사망 1492년 10월 12일, 산세폴크로
국적 이탈리아

요약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로 주요 작품은 프레스코 연작인 <성 십자가의 전설>. 아버지가 제혁업자였기 때문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측되며 초기에는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지도 아래 대가들의 그림을 연구하였다. 그후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미술과 접촉하면서부터 자신의 고유 양식을 정립했다. <성 십자가의 전설> 연작에서 보이는 명쾌한 구도와 원근법의 절제된 사용, 차분한 분위기는 피에로의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후 북부 이탈리아와 베네치아 미술에서 웅장한 종교화를 발전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초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생애에 관한 기록 자료들은 얼마 안 되지만 그것으로 그의 생각과 활동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현존하는 그의 그림들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버지인 베네데토 데이 프란체스카는 제혁업자 겸 구두 제조업자였으며, 재정적으로 부유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라틴어에 정통한 교양 있는 인물로 교육시킬 수 있었다. 피에로가 시에나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그 지방의 화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초기교육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1439년 무렵 초기 르네상스 양식이 번성하기 시작하던 피렌체에서 산타마리아누오바 병원의 프레스코를 그리고 있었던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협력자로서 일했다. 거기에서 그는 도나텔로와 루카 델라 로비아의 조상들과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건물들 및 마사초와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을 연구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인문주의자이자 건축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쓴 회화에 관한 논문을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지도를 받아 이 대가들을 연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베네치아노 자신도 르네상스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회화의 구성 요소로서 색채와 빛을 강조하는 그림을 그렸다.

피에로가 자신의 독특한 양식의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은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미술과 접촉하면서부터였다.

1442년경 산세폴크로로 돌아온 피에로는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3년 뒤 콘프라테르니타 델라 미제리코르디아의 제단 장식을 맡게 되었다. 이 다폭 제단화는 피렌체의 미술가인 도나텔로와 마사초의 영향과 기하학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특징 및 천천히 신중하게 그리는 그의 습성(이 제단화는 1462년에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외딴 시골 지방인 산세폴크로에 가끔씩 와서 머물렀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활동에 필요불가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산세폴크로의 조용한 생활과 페라라·리미니와 같은 예술과 지성의 중심지에서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적인 생활을 누렸다. 1448년경 페라라에서 마르케세 레오넬로 데스테 밑에서 일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북부 이탈리아 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1451년 북부 이탈리아의 또다른 도시인 리미니에서 알베르티의 건축설계도에 따라 지어진 기념교회인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에 〈성 지기스문두스 앞에 선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 Sigismondo Malatesta Before St. Sigismund〉라는 화려한 프레스코(디자인이 문장과 비슷함)를 그렸다.

그밖에 1451년 이전의 초기에 그린 그림에는 〈예수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도 포함된다.

예수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

피에로의 작품

ⓒ Piero della Francesca/wikipedia | Public Domain

성숙기

아레초에 있는 산프란체스코 교회의 성가대석에 그린 프레스코들에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성숙한 양식이 나타나 있다.

이 장식들은 1447년에 나이가 지긋한 비치 디 로렌초가 시작했으나 그가 1452년에 죽고 난 후 피에로가 그뒤 곧 이 작업을 이어받아 완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성 십자가의 전설〉을 이야기체로 묘사하고 있는 이 연작은 1466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구도와 원근법의 절제된 사용, 차분한 분위기 등은 모두 그의 전성기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아레초의 연작과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는 아레초 대성당에 있는 프레스코인 〈막달라 마리아 Magdalen〉와 산세폴크로의 시청에 있는 〈부활 Resurrection〉, 몬테르키의 묘지 예배당에 있는 〈출산중의 성모 Madonna del Parto〉 등이 있다.

출산중의 성모(Madonna del Parto)

ⓒ Piero della Francesca/wikipedia | CC BY-SA 3.0

1454년 산세폴크로의 시민인 아뇰로 디 조반니 디 시모네 단젤로가 피에로에게 산아고스티노 교회의 제단 장식을 맡겼는데, 그는 이것을 1469년에야 비로소 완성했다. 이 제단화 가운데 남아 있는 패널들은 피에로가 선과 빛을 사용하여 조각처럼 웅장한 인물들을 창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459년 피에로는 교황 피우스 2세의 요청에 따라 바티칸 궁전에 프레스코(지금은 파괴되었음)를 그리기 위해 로마에 갔다.

그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성 루가 St. Luke〉(산타마리아마조레 교회)는 그가 로마에 차린 공방의 조수들이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보다 더 큰 결실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백작(뒤에 공작이 됨)과 오랫동안 친분을 맺게 된 것이었는데, 공작의 대저택은 매우 교양 있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의 등대'로 여겨졌다. 1450년대 후반에 피에로는 원래 우르비노 대성당의 성구보관실에 있었던 〈예수의 책형 Flagellation of Christ〉을 그렸는데, 이 작품의 명쾌한 원근법 구도는 예수를 원경에 그리고 3명의 알 수 없는 인물을 전경에 부각시킨 주제의 처리와 대조적이다.

예수의 책형(Flagellation of Christ)

ⓒ Ham II/wikipedia | Public Domain

이 그림의 내용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페데리코 백작과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를 그린 유명한 2폭 초상화(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는 아마 1465년에 이루어진 그들의 결혼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들은 피에로가 그 백작의 평범한 얼굴 생김과 배경의 매혹적인 풍경을 그릴 때 시각적 사실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또한 그가 이미 네덜란드의 회화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뒷면은 역천사들과 함께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는 백작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우르비노의 산베르나르디노 교회에 그린 제단화(1472~74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에 있음)에서 그 백작은 무릎을 꿇은 기증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 제단화에는 백작과 성모, 아기 예수, 그리고 동행한 성자들이 웅장한 교회의 앱스(반원형의 성가대석) 앞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아기를 낳다가 죽은 바티스타 백작 부인을 추모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공간 속의 형태들을 가장 세련되게 표현한 르네상스 양식의 작품들 중 하나로 북부 이탈리아와 베네치아의 미술에서 웅장한 종교화들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말기

피에로는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산세폴크로에서 보냈는데, 1474, 1478년에 그 지방 교회의 주문으로 그린 그림들은 없어졌다.

1480년 그는 산바르톨로메오 자선단체의 원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그 가운데는 런던에 있는 조화로운 구도의 〈성탄 Nativity〉과 원래는 세니갈리아 근처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교회에 있다가 지금은 우르비노에 있는 〈성모 Madonna〉, 페루자에 있는 서투른 구도의 제단 장식인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with Child and Saints〉 등이 남아 있다.

역시 그 제단화에 들어 있는 〈수태고지 Annunciation〉는 피에로가 여전히 원근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에로는 노년기에 좀더 심오한 문제들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만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474~82년 회화에 관한 논문인 〈회화에서 원근법에 관하여 De prospectiva pingendi〉를 써서 그의 후원자인 우르비노 공작에게 헌정했다.

주제의 범위와 체계화의 방법에서 이 책은 알베르티와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자인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를 따르고 있다. 현재 파르마의 팔라티나 도서관에 있는 이 논문은 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으로, 그가 그린 기하학과 균형, 원근법의 문제들에 관한 그림들이 들어 있다. 1482년 이후에 쓴 또다른 논문인 〈5개의 정다면체에 관하여 De quinque corporibus regularibus〉는 완전한 비례에 대한 개념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를 따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피에로가 삽화를 그린 이 논문의 원고는 현재 바티칸 도서관에 있다. 〈주판에 관하여 Del abaco〉(피렌체 라우렌티아나 도서관)는 응용수학에 관한 안내책자이다.

피에로가 기하학과 수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자신의 미술에서 연유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이론의 전개 방식은 스승인 알베르티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보다 젊었던 동시대의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식과 비슷하지만, 논법의 엄밀함과 논리성은 피에로만의 독특한 것이다.

16세기의 자료에 따르면, 피에로는 말년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1490년에 쓴 여러 편의 자필 원고들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피에로는 틀림없이 그 이후에 눈이 멀었을 것이다. 더욱이 1486년에 작성된 그의 유서에서 그는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의 화풍은 중부 이탈리아 미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루카 시뇨렐리와 페루지노가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추정되지만 그의 본보기를 따르지는 않았다. 피에로의 절제된 미술은 동시대의 뛰어난 피렌체파 화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는 과학적인 업적들로 말미암아 큰 명성을 누렸다.

1497년 그는 '우리 시대의 회화와 건축에 관한 대가'로 평가되었으며,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두 세대가 지난 후에 그를 높이 칭찬했다. 20세기에 들어와 피에로의 생애는 재조명되고 그의 위치는 재평가되어 그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이면서도 시적인 특질이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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