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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터 요한

다른 표기 언어 Prester John

요약 전설적인 동방정교회의 지도자.
Presbyter John, John the Elder라고도 함.

중세 연대기와 전승들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데 희망을 준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네스토리우스파(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동방정교회의 분파)였으며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를 넘어 극동지역에서' 다스린 사제 겸 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장로 요한'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전설에 등장한다.

이 전설은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팔레스타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되찾기를 바라던 십자군원정 기간(11세기말~13세기)에 생겼다.

1071년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정복당했다. 1145년 시리아 게발(지금의 레바논 유바일)의 휴 주교가 이탈리아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청에 프레스터 요한에 관하여 보낸 보고에 근거를 둔 이 이야기는 독일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에 의해 그의 〈연대기 Chronicon〉(1145)에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유하고 권세 있던 '사제왕' 요한은 아기 예수를 방문했던 동방박사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그는 전쟁에서 페르시아 왕들을 물리쳤으며, 엑바타나에 있는 그들의 수도를 습격했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하려고 했으나 티그리스 강을 건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 마지막 목적지에서 제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휴 주교가 전하는 그 전쟁은 1141년 페르시아 콰트완에서 벌어졌으며, 중앙 아시아에 있던 카라키타이 제국의 건국자인 몽골왕 예루 타시가 셀주크족의 이슬람교 군주인 산자르를 물리쳤던 그 전쟁이었다.

카라키타이 제국 군주의 칭호는 구르칸 또는 코르칸이었는데, 그것이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요하난, 시리아어로는 유하난으로 바뀌게 되었고 라틴어로 요한네스 또는 요한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구르칸들은 몽골의 불교도들이었지만, 그들의 많은 고위직 신하들이 네스토리우스파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교사 빌렘 반 뢰이즈브루크가 1235년에 쓴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 아시아인으로 마지막 구르칸의 딸인 나이만의 왕 퀴클뤽의 아내도 그리스도교도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타양 칸(중국어로 '요한 대왕'이라는 뜻)인 퀴클뤽은 1218년 대(大) 몽골의 지도자 칭기즈 칸에게 패배했다. 1221년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크레의 주교 자크 드 비트리와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십자군과 동행했던 추기경 펠라기우스는, 프레스터 요한의 아들이거나 손자인 인도의 데이비드 왕에게 이슬람교도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로마에 보고했는데, 이 왕이 바로 칭기즈 칸이었던 것 같다.

믿을 만한 정보의 부족과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의 염원 때문에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 인물, 지리적 장소들이 한데 섞여서 프레스터 요한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알베리크 드 트루아퐁텐은 1165년에 프레스터 요한이 쓴 편지 1장이 여러 명의 유럽 지도자들, 특히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전달되었다고 기록했다.

허구적인 성격을 띤 이 편지는 라틴어로 씌어졌으며, 히브리어와 고대 슬라브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 편지가 비잔틴 황제 앞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편지의 그리스어 본문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 담긴 반(反)비잔틴적인 경향은 비잔틴 황제를 '황제'라고 부르기보다 '로마인의 통치자'라고 부른 것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편지에서 프레스터 요한의 영토인 '인도의 3개국'은 대주교들과 소수도원장들과 왕들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자연, 경이로움, 평화의 땅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로라는 간단한 칭호를 가진 요한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교도와 싸워 예수의 거룩한 무덤을 되찾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 한다고 선언했다. 그 편지에는 요한이 인도 미라포레에서 인도 최초의 그리스도교 전도자가 된 성 토마스의 후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레스터 요한이 보낸 사절에 대한 응답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인도의 탁월하고 위대한 왕이며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아들'인 요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편지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알렉산데르가 바르바로사와의 논쟁에서 지원을 받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13, 14세기에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을 찾아나선 조반니 다 피안델 카르피니,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 마르코 폴로와 같은 여러 부류의 선교사와 평신도 여행가들은 서양과 몽골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교섭을 가능하게 했다.

14세기 중반 이후 에티오피아는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을 탐색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레스터 요한은 이 아프리카 그리스도교 국가의 네구스(황제)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프레스터 요한은 아시아 지역, 특히 네스토리우스파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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