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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 5. 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근처 쿰로베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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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0. 5. 4, 유고슬라비아 류블랴나 |
국적 | 유고슬라비아 |
요약
유고슬라비아의 정치가.
본명은 Josip Broz.
개요
1943년부터 유고슬라비아를 효과적으로 이끌었으며, 1953년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0년까지 재직했다.
1948년 공산주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즉 티토주의를 창시하여 소련에 도전했다.
초기생애
티토(1934~)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쿰로베츠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이고 어머니는 슬로베니아인이었다. 형제는 15명이었는데 그는 7번째였다. 그의 공식적인 출생일은 5월 25일로 되어 있으나 가난한 대가족의 아이들은 대개 출생일이 정확하지 않다. 13세 때 시사크로 가서 자물쇠 제조공이 되기 위한 도제생활을 했다. 청소년시절에는 트리에스테·보헤미아·독일 등지에서 금속품제작자로 일했다. 이때 금속제조업자의 노동조합과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자그레브에 있는 제25연대에 참여했는데, 이 연대는 1914년 8월 세르비아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반전활동을 확산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페트로바라딘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1915년 1월 무죄판결을 받아 카르파티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25연대로 귀대했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의 용감한 행동으로 훈장을 받았다.
그의 연대가 부코비나 전선으로 이동할 때 카자크인의 창에 찔려 중상을 입고 러시아 군대에 생포되었다.
1920년대의 공산당 활동
티토는 1920년까지 러시아에 있다가 그해 러시아인 아내(1935 이혼)와 함께 크로아티아로 돌아왔다.
이후 벨로바르 근처에 있는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했다. 후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Yugoslavia/CPY)에 입당하여 1923년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으며 2명의 아이를 잃었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1925년 또다시 체포되어 7개월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27년 4월 CPY 자그레브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CPY 내 여러 분파에 대항해 코민테른의 공개편지를 지지했다.
1928년에는 CPY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8월 4일 다시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는 자신에 대한 법정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티토는 CPY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중앙위원회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를 출발하여 모스크바·파리·프라하·빈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비밀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중 티토라는 이름을 가장 즐겨 사용했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는 코민테른의 발칸 지부에서 일했고, 제7차 코민테른 회의에도 참가했다. 1936년 8월에는 CPY 정치국의 조직부장으로 지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에 살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으며, 약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CPY는 코민테른의 고위 관리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도움을 받아 해체를 면할 수 있었다. 1937년 후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티토를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온 티토는 E. 카르델리, M. 딜라스, A. 랑코비치, I. 리바르와 같은 젊은 혁명세력들을 당 지도부에 기용하는 등 CPY를 재조직했다.
1940년 10월 제5차 CPY 전당대회가 비밀리에 개최되었고, 105명의 당원이 참석했다. 티토는 공식적으로 당 중앙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CPY의 당원은 6,000여 명, 청년공산주의 연맹의 회원은 3만 명에 이르렀다. 1937년 티토는 1,300명의 유고슬라비아 자원단을 스페인 내란에 파견했다. 이들 자원단은 이후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세력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저항운동의 조직
1941년 4월 6일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했다.
같은 해 6월초 헤르체고비나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인 농민들은 크로티아인 우스타셰(Ustase)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기했다. 당시 우스타셰는 분리주의자로 구성된 테러 조직으로서 독일을 지지했다.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티토는 저항운동을 개시했다. 티토는 총궐기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형제애와 단결을 호소하면서, 독립 후에는 평등이 보장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봉기는 신속하게 확산되었고, 그해 늦여름 유고슬라비아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이 해방되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있는 해방지역은 처음에는 티토의 파르티잔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조국군(체트니크라고도 함)이 장악하고 있었다. 티토는 서부 세르비아에 있는 우지체에 총본부를 설치했다.
모스크바의 희망과는 달리 새로운 혁명정부는 해방지역에서 수립되었다.
이 문제와 다른 사안을 둘러싸고 티토와 왕조의 망명정부, 그리고 국내에서 망명정부를 대표하는 D. 미하일로비치(드라자라고 함)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러시아 전선과 그리스에서 차출한 병력을 이용하여 독일은 그해 11월 파르티잔을 색출하기 위해 우지체 지역을 공격했다. 막대한 사상자를 낸후 마지막까지 저항본부를 지키던 티토는 진격하는 독일군과 싸우다가 거의 생포될 뻔했다. 독일은 이 공격을 포함하여 7차례에 걸쳐 티토 진영을 공격했다.
파르티잔 운동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그해 12월 티토는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게릴라 기습부대로 구성된 프롤레타리아 특수여단을 조직했다. 파르티잔의 활동이 증가하자, 1943년초 히틀러는 2차례(네레트바 전투와 수톄스카 전투)에 걸쳐 파르티잔의 중심부대와 사령부를 공격했다. 10개 이상의 독일 사단이 참가했고, 6개의 이탈리아 사단과 친(親)나치 집단이 독일을 도왔다.
겨울 동안 파르티잔들은 4,000명 이상의 부상자들과 함께 이 산 저 산을 옮겨다니면서 독일의 포위 공격군을 모두 무찔렀다. 이들 전투는 유고슬라비아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수톄스카 전투에서는 6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티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원수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조건부로 항복한 후 파르티잔의 수는 25만 명을 웃돌았다.
티토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어떠한 강대국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유고슬라비아 국가해방위원회의 반파시스트 회의인 파르티잔 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심했다. 이 의회는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했고, 유고슬라비아는 평등한 민족들로 구성된 공산주의 연방이라고 선언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원수라는 칭호를 받았다.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파르티잔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했으며, 이들에게 군사 고문단과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5월 25일 히틀러는 보스니아의 드르바르에 있는 파르티잔 사령부에 낙하산 부대와 탱크 공격을 기습적으로 감행했고, 티토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망명정부와 티토의 혁명정부를 통합시키기 위해, 스탈린과 처칠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각 정부는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50:50 협정). 그러나 티토는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는 데 뛰어난 외교적 기술을 발휘했는데, 그것은 1944년 8월 네이플에서 있었던 처칠과의 회담, 같은 해 9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스탈린과의 회담을 통해서였다.
1945년 8월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조건부 항복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 있던 독일군 부대는 계속해서 전투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결과 유고슬라비아에서 독일군과 친독 유고슬라비아인들은 5월 15일까지 저항하다가 전멸되었다. 전쟁은 유고슬라비아를 황폐화시켰다. 전쟁으로 전인구의 11% 이상이 사망했고, 전쟁의 상처는 너무나 깊고 값비쌌다. 종전 무렵 티토와 서방측의 관계는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티토가 트리에스테의 점령을 시도했고, 그리스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으며, 슬로베니아 상공에서 2대의 미국 비행기를 격추시켰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순수한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토와 서방측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6월 28일 스탈린은 코민포름에서 CPY를 축출함으로써 티토를 공격했다.
스탈린과의 갈등
스탈린과의 갈등은 유고슬라비아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티토의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스탈린은 경제적 봉쇄, 선동, 국경분쟁, 군사침략의 위협 등을 통해 티토의 영향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유고슬라비아의 고립을 유발시켜 소련에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은 오히려 티토를 중심으로 한 유고슬로비아 국민의 단결을 강화시켰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변경했고, 1955년 6월 2일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가 이끄는 대표단이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이때 소련은 공식적으로 스탈린의 정책을 부정하면서, 티토가 주장한 국가의 평등성을 인정했다.
또한 소련은 각국의 실정에 맞는 고유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경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티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라는 티토의 개념은 헌법 개정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최초의 유고슬라비아 헌법(1946)은 소련의 헌법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즉 구헌법에서는 파르티잔 투쟁기간중에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고 있는 각 공화국이 획득한 많은 권리들은 중앙정부에 귀속되었고, 중앙정부가 경제에 대한 행정적 통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스탈린과의 단절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개혁이 이루어져 정부의 기능이 분권화되었고, 각 공화국은 보다 많은 자유를 얻었다. 또한 노동자위원회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민족위원회가 창설되었다. 1953년 1월 13일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첫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7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위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연방(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민족들로 구성된 평등 공동체)과 공화국(연방 내에서 주권을 가진 사회주의 공화국을 구성하는 5개의 민족) 관계는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상호 의존적이며, 유고슬라비아 내의 사회적·정치적 공동체들을 연결시켰다.
비동맹정책
대외적으로 티토는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해 비동맹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중립정책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와 협력하여 25개국이 참여한 비동맹회의를 소집했다(비동맹운동). 1962~70년에 티토는 이러한 정책을 확대하기 위해 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순방했다. 1968년 8월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티토는 "이러한 소련의 행위는 사회주의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전세계의 사회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세력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라고 소련을 비난했다.
이후 그는 정규군을 강화하기 위해 파르티잔 부대를 창설하고 방위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병역법이 제정되어 남자의 경우 병역 의무가 65세까지 확대되었고, 19~40세의 여성들은 민병대에 배치되었다. 1970년 9월 티토는 집단지도체제의 수립계획을 발표했고, 이 계획은 1974년 헌법으로 공식화되었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의 통치형태는 집단지도체제로 이행했다.
티토가 저항운동의 지도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결단력, 적응력, 도덕적 열정, 강인한 체력, 유머 감각 등은 독립 후 30년 이상 유고슬라비아에 안정된 지도력을 제공했다.
티토는 해외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자주 여행했다. 1970년대초 그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존경받았고, 3번째 부인인 요반카 부디사블례비치와 함께 베오그라드나 브리오니 섬 휴양지에서 살았다. 그는 사진찍기·사냥·낚시 등을 즐겼으며, 유럽에서 옷 잘 입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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