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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9. 3. 19, 프로이센 퀴스트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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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0. 3. 6, 뮌헨 근처 에벤하우젠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해군 제독.
본명은 Alfred Tirpitz.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7년 동안 독일 해군을 증강시킨 주요인물이며, 빌헬름 2세 황제시대에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1900년에 귀족이 되었고, 1903년에 해군 제독의 지위를 얻었으며, 1911년에는 대제독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1916년에 퇴역했다.
초기생애와 집권
프로이센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1865년 해군 소위후보생으로 프로이센 해군에 들어갔고, 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869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어뢰정 소함대 지휘관과 어뢰정 함대의 감찰총감을 지낸 뒤, 해군 최고사령부 참모장이 되어 기술적 능력을 과시했고, 전술 원칙을 고안해 체계적으로 개발했다. 1895년에 소장으로 진급한 뒤 1896~97년에 동아시아에 파견되어 독일 순양함대를 지휘했고, 중국의 칭다오[靑島]를 미래의 독일 해군기지로 선정했다. 1897년 6월에는 독일 제국 해군장관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20년 동안 그는 황제 빌헬름 2세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일 함대를 증강했다.
1898년 티르피츠는 독일 해군력 개편을 위해 제1차 함대법을 도입했다.
이 법률은 1904년까지 해군이 기함 1척과 전함 16척, 근해 장갑함 8척, 대형 순양함 9척 및 소형 순양함 26척을 갖추도록 규정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 대한 전쟁에서는 해군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해군력이면 충분히 막강할 것으로 여겨졌다. 1898년의 법률이 공해 내에서 활동할 전투 함대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1900년에 도입한 제2차 함대법은 좀더 야심적인 계획(더욱 크고 근대적인 외양 함대)을 규정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 법률은 1917년까지 현역 해군을 기함 2척과 전함 36척, 대형 순양함 11척 및 소형 순양함 34척으로 증강하도록 규정했다.
그는 좀더 강력한 해군에 관심을 쏟도록 대중을 자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1897년에 국무장관이 되자 의회통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었다. 1900년에 귀족이 되었고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으며, 1911년에는 대제독의 지위에 올랐다.
한편 영국은 1900년의 해군법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별로 중요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반응은 뒤늦게 나타났다. 영국은 1904년에 프랑스와, 1907년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뒤에야 독일의 해군법에 반응해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진수시켰다.
이것은 특대형 주력함을 만들어 중요한 기술적 이점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산으로 드러났다. 다른 강대국들만이 아니라 소규모 해군을 가진 칠레나 투르크 같은 나라들까지도 당장 영국을 흉내내어 특대형 주력함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1905년(이때 이미 영국은 주요경쟁국인 독일보다 주력함을 7척이나 더 보유하고 있었음)부터 줄곧 독일보다 한 발 앞서 있었고, 영국의 선박 건조 능력은 빠르게 증강한 반면 독일의 건조 능력은 급속히 쇠퇴했기 때문에, 1914년 당시 이미 건조되어 작전에 투입되었거나 건조중에 있던 영국 전함은 49척이었던 반면 같은 형태의 독일 전함은 29척에 불과했다.
티르피츠의 정책에 대한 비판
티르피츠의 목표를 생각할 때 결정적인 문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정도까지 해군의 전력을 확대하는 것이 과연 좋은 정책인가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치적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제2차 해군법에 따라 이른바 '리시코플로테'(잠재적인 공격자를 저지하는 '위험 함대')가 확립된 1900년부터 전시의 현실적인 방어력을 위해서뿐 아니라, 평화시에는 동맹관계의 유용한 자산으로 해군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해졌다. 빌헬름 2세와 티르피츠는 영국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압력을 강화함으로써 영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동맹관계를 풀지 않을 수 없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영국의 육군장관 홀데인 경이 회담을 목적으로 1912년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 독일은 영국한테서 더이상 정치적 양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당시 독일은 이미 1년에 4척씩 전함을 건조한다는 계획에 차질을 빚어 전함 건조를 중단하고 영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을 포기한 상태였다. 따라서 티르피츠의 해군 정책은 더이상 현실적인 위협이 아니었으나 영국 국민에게는 계속 위협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독일과 영국 사이에 싹튼 긴장완화가 전쟁이 선언된 1914년 7월까지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은 비극이었다.
티르피츠가 공해함대를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해도 연합국의 해군력이 독일보다 훨씬 우세한 상황에서 상대의 공격을 미리 저지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실패하기 마련이었으며, 해전에서 승부를 결정 지을 조건이 독일에 훨씬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지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까지도 여기에 필요한 잠수함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조차도 더이상 일시적인 효과밖에 갖지 못했을 것이다.
점점 강력해지는 반대에 부딪친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이상 사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1916년 3월 사임했다. 후방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알고 걱정한 나머지 그는 '조국당'이라는 애국운동의 공동 창시자가 되었지만, 이 운동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는 1924~28년에 독일 국민당 소속 의원으로 다시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으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바이에른으로 은퇴해 1930년 에벤하우젠에서 죽었다.
평가
티르피츠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근대적인 해군장교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헌신적인 정신, 과학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다. 그는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는 편견을 가지기 쉬웠고, 일단 자신의 원칙을 선언하면 그것을 신조처럼 따랐다. 그는 해군법을 꾸준히 실행하는 것을 다른 어떤 기술적·전술적·정치적 고려 사항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해군건설과 그 효과는 해군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고 따라서 해군의 정치적 가치도 결정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독일 해군은 그의 지휘 아래 세계에서 2번째로 강력해졌고, 티르피츠는 독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이 해군을 효율적인 군사 무기로 만들었지만, 이 무기는 전쟁에서 애초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결국 내부로부터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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