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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다른 표기 언어 Jeanne-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요약 테이블
출생 1721. 12. 29, 파리
사망 1764. 4. 15, 베르사유
국적 프랑스

요약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부모는 중산층으로 금융가의 투기꾼이었다. 그녀는 부자의 아내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당시 부자들은 하층민 출신이더라도 예술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아내들도 이같은 관심을 공유하기를 기대했다.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어떤 상류사회에서든 자신의 존재를 내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볼테르와 같은 유명인사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1744년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과 법적인 이혼절차를 밟은 뒤 퐁파두르 후작작위를 받았다. 19세기 사가들은 퐁파두르가 루이 15세를 압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퐁파두르는 5년쯤 지나 아래층의 정식 왕실로 거처를 정했다. 루이 15세는 이후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으나 퐁파두르의 지위는 전보다 확고해졌다. 국왕의 허락, 승진, 특권의 행사가 그녀의 집무실을 통해 이루어졌다. 퐁파두르는 국왕과 정치·예술 양면에서 공동으로 협력했다. 파리의 에콜 미리테르와 루이 15세 궁전(지금의 콩코르 궁전), 베르사유의 콤피앙 궁전과 페티트 트리아농 궁전 등을 설계·건축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는 화가, 조각가, 가구제조업자, 왕실 세공업자 등 모든 종류의 장식미술가들을 후원했다. 유명한 도자기 공장이 세브레에 건립되기도 했다. 퐁파두르의 20년 전성기는 프랑스 양식의 최고 정점을 이루었다.

개요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퐁파두르 부인과 그녀의 자수틀(Madame de Pompadour at her Tambour 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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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그녀의 부모는 중산층으로 금융가의 투기꾼이었다.

당시 일부 투기꾼은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대부분은 감옥신세 아니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이 암시장사건에 연루되어 1725년 국외로 도망한 후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두 자녀는 그들보다 더 부자인 친구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 보살폈다. 두 자녀는 총명했고 그중 딸은 더욱 뛰어났다. 그녀는 부자의 아내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당시 부자들은 하층민 출신이더라도 예술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아내들도 이같은 관심을 공유하기를 기대했다.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어떤 상류사회에서든 자신의 존재를 내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볼테르와 같은 유명인사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은 그녀를 자신의 친조카이며 유망한 젊은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투알과 짝을 맺어주었다. 그들은 딸 알렉산드리네를 두었다. 그녀는 파리 사교계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고 국왕 루이 15세의 찬사를 받았다. 1744년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과 법적인 이혼절차를 밟은 뒤 퐁파두르 후작작위를 받았다.

19세기 사가들은 퐁파두르가 루이 15세를 압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혁명 후의 사가들은 당시 부르봉 왕가를 열악한 인물들로 그렸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루이 15세가 사가들이 묘사한 것보다 능력있는 인물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부끄럼 많고 내성적인 루이 15세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퐁파두르는 그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면서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결정은 국왕이 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조심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왕궁의 다락방 몇 개를 사용하던 그녀는 우선 마리 왕비(마리아 레슈친스카)를 비롯한 왕궁의 중요 인물들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기 시작했다.

왕비는 멋있고 예술적이며 세련되고 쾌락을 추구하는 국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아내였다. 그녀는 국왕보다 8살 연상으로 아버지(폴란드의 망명국왕)의 안녕과 자식양육, 신앙에만 몰두했다. 왕세자를 비롯한 8~9명의 자녀를 낳은 뒤 국왕에게 성적인 접촉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퐁파두르는 5년쯤 지나 아래층의 정식 왕실로 거처를 정했다. 루이 15세는 이후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으나 퐁파두르의 지위는 전보다 확고해졌다. 국왕의 허락, 승진, 특권의 행사가 그녀의 집무실을 통해 이루어졌다.

루이 15세와의 예술적·정치적인 협력

퐁파두르는 국왕과 정치·예술 양면에서 공동으로 협력했다.

예술 분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녀의 제의로 그녀의 오빠는 왕궁 감독관에 임명되고 마리니 후작 칭호도 얻었다. 국왕, 퐁파두르, 마리니 후작은 완전한 3박자 조화를 이루어 파리의 에콜 미리테르와 루이 15세 궁전(지금의 콩코르 궁전), 베르사유의 콤피앙 궁전과 페티트 트리아농 궁전의 대부분, 퐁텐블로 궁전의 날개, 아름다운 샤토 드 벨류브, 많은 간이건물과 여름 휴양소 등을 설계·건축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는 화가, 조각가, 가구제조업자, 왕실 세공업자 등 모든 종류의 장식미술가들을 후원했다.

유명한 도자기 공장이 세브레에 건립되기도 했다. 퐁파두르의 20년 전성기는 프랑스 양식의 최고 정점을 이루었다. 작가와 백과사전 편집자의 후원자인 그녀는 미술분야와 같이 문학도 후원하려 했으나 국왕은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알고 있는 지식인들을 싫어했다.

정치분야는 예술분야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정치인들과 장군들의 자질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능한 관료 수아죌 공작이 퐁파두르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공국들에 대항해 프랑스와 옛 적국 오스트리아가 연합하는 유명한 반동맹(Reversal of Alliances)을 추진했다. 이 전략은 정치가다운 발상이었으나 여론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프랑스에 재앙을 안겨준 7년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규모는 대단하지만 지휘통솔능력이 결여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그 사이 영국은 캐나다로부터 프랑스를 몰아냈다. 이러한 패배의 결과는 퐁파두르에게 몰아닥쳤으며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전쟁이 끝나자마자 베르사유 궁전에서 죽었다. 사인은 폐암으로 추정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재판 오심(誤審) 사건인 칼라 사건의 번복에 대해 루이 15세의 승인을 얻어냈다. 볼테르는 퐁파두르 부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천성이 진실한 그녀는 국왕을 사랑했다.

그녀는 올바른 영혼과 정의로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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