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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8. 3. 8, 코르시카 알라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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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2. 2. 15, 프랑스 파리 |
국적 | 코르시카 |
요약
코르시카의 귀족.
본명은 Carlo-Andrea Pozzo di Borgo.
러시아 외교관으로 들어가 나폴레옹 전쟁 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1801~25 재위)와 니콜라이 1세(1825~55 재위)와 니콜라이 1세(1825~55재위)의 궁정에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의 국익을 증진시켰다. 코르시카에서 태어났고 코르시카가 프랑스에 합병되는 것을 지지했다.
코르시카가 프랑스의 한 주(州)로 공표된 뒤, 프랑스 입법의회(1791~92)에서 코르시카 대표로 일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코르시카를 영국 보호령으로 만들기 위한 반란을 지지했다(1793). 영국의 통치가 끝나자(1796) 코르시카 주재 영국 총독 길버트 엘리엇 경을 따라 빈으로 갔다가(1798) 대(對) 프랑스 동맹에 러시아가 참가할 것을 예견하고 러시아군에 들어갔다.
뒤이어 미묘한 외교 임무를 띠고 빈과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과 화해하자(틸지트 조약, 1807) 사임하고 빈으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 다시 사이가 벌어지자 알렉산드르의 부름을 받아 다시 러시아군에 들어갔으며(1812), 프랑스와 싸우는 데 스웨덴의 협력을 얻어냈고 러시아 군대의 장군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자(1814), 포초는 러시아 대사로서 프랑스 왕궁에 파견되었으며 빈 회의의 러시아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동안 루이 18세와 함께 잠시 벨기에의 헨트로 피신했다. 나폴레옹이 최종적으로 패배한 뒤, 프랑스 국익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그 대가로 그에게 백작작위와 귀족작위를 주었다(1818).
샤를 10세(1824~30 재위)가 반동 통치를 하는 동안 파리에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지만 여전히 직책은 지켰다. 1830년 혁명으로 샤를이 퇴위한 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기를 꺼렸지만 포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의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지나치게 프랑스 편을 들어 러시아의 국익에 손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져 1835년 런던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병이 나자 은퇴해(1839) 파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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