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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73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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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57. 10. 31/11. 1, 베네치아 |
국적 | 이탈리아, 베네치아 |
요약 베네치아의 최고행정관.
그의 치세에 베네치아는 밀라노와 오랜 동안 전쟁을 치러 힘을 크게 소모했다. 그의 일생을 주제로 해 영국의 시인 바이런 경은 비극 〈포스카리 The Two Foscari〉를, 주세페 베르디는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지었다.
베네치아의 이름난 가문 출신으로 베네치아가 영토 팽창 정책을 추구할 때 시(市)의 통치기구였던 40인 위원회(1401)와 10인위원회(1405~13)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1423년 최고행정관(doge)으로 뽑힌 직후 피렌체와 동맹을 맺어 밀라노 공작인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전쟁을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1426년 브레시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평화조약에 합의했다. 1431년 다시 전쟁이 일어났으며 1433년의 페라라 평화조약은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볼로냐와의 전쟁 이후 1441년에 맺은 조약으로 베네치아의 영토는 늘어났다. 1443년 밀라노와 전쟁을 재개했으며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죽은 뒤에도 계속 싸웠다. 그결과 이탈리아 북부의 대부분 지역이 황폐해졌으며 이 복잡한 동맹 체제 가운데 어느 나라도 뚜렷한 승자는 되지 못했다. 마침내 1454년 로디 평화조약으로 적대관계는 끝났으며 베네치아·피렌체·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 동맹이 결성되었다. 포스카리가 이탈리아 내부에서의 전쟁에 몰두해 있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족에게 함락됨으로써(1453) 그는 베네치아의 동쪽 영토를 투르크에 빼앗겼다. 이로써 베네치아의 동방무역이 타격을 입자 포스카리의 적들은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포스카리를 베네치아 제독 피에로 로레단의 살해범이라고 기소했으나 이는 부당한 비난이었던 것 같다. 포스카리의 아들은 반역죄 혐의를 받고 추방당했으며 포스카리 자신도 비난 때문에 10인위원회의 정식 요청으로 사임해야만 했다(1457. 10. 23). 그는 8일 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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