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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68년 5월까지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
이 문서는 1967년 미국의 국방장관 로버트 S. 맥나마라의 책임하에 작성되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부설 국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었던 다니엘 엘스버그는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 문서들을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에 제공했다. 총 47권으로 된 펜타곤 페이퍼는 약 3,000쪽에 달하는 설명과 4,000쪽의 부속서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완성하는 데 18개월이 걸렸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엘스버그는 처음에는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이 보고서 작성이 끝나갈 무렵에는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저의를 폭로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엘스버그는 이 보고서 가운데 주요부분을 언론에 누출시켰다.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연방정부가 '최고 기밀서류'로 취급하고 있던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에 3회분 기사가 실린 후 미국 법무부는 연방 제1심 법원으로부터 국가기밀서류의 공표를 금지시키는 임시명령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이때 법무부는 이 보고서를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보도한다면 미국의 안보이익에 '치명적이며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역시 이 보고서를 입수하고 있던 〈워싱턴 포스트 The Washington Post〉지와 연합하여 법원의 금지명령에 대항해 15일 동안 법정투쟁을 벌였고, 이 기간중 연재기사는 중단되었다. 1971년 6월 30일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전억제 명령 사건(prior-restraint case)으로 간주된 이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6 대 3의 판결로 양 신문사에게 문제의 보고서를 다시 게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또한 법원은 이 보고서의 공표를 제한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펜타곤 페이퍼는 첫째,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베트남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므로 미국은 베트남 사태에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둘째,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산주의 세력의 남베트남 탈환을 막고 북베트남에 있는 새로운 공산주의 정권을 와해시키기로 결심했으며, 셋째,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전임자에게 인계받은 '제한전쟁전략'을 대대적인 전쟁개입정책으로 전환시켰고, 넷째, L. B.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과의 비밀전쟁을 확대하는 한편 미국의 대대적인 개입정책이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1년 전인 1964년에 공개적인 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계획을 입안했으며, 다섯째,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남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의 반란지지행위를 중단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국 정보조직의 판단을 무시하고 폭격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폭로했다.
펜타곤 페이퍼는 수년 간에 걸쳐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증대를 둘러싸고, 그 법률적·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던 시기에 공표되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쟁을 야기시켰다.
국가의 최고 기밀서류가 폭로되고 계속 연재되자 1972년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던 닉슨 행정부는 당황했다. 펜타곤 페이퍼의 폭로로 곤경에 처해 있던 닉슨은 엘스버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의 조사중에 명백히 밝혀졌다.
펜타곤 페이퍼는 1971년 〈펜타곤 페이퍼 The Pentagon Papers〉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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