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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라메수

다른 표기 언어 Per Ramessu

요약 고대 이집트 제15·19·20대 왕조 시대의 수도.
Pi Ramesse라고도 함. 지금의 Qantír, Khatána, Tall ad-Daba⁾a. 성서에서는 Raamses.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100㎞ 떨어진 북동부 삼각주에 있으며, 고대에는 나일 강의 지류인 부바스티스 강가에 있었다. 고왕국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BC 1674년경 힉소스 왕조에 점령당해 아바리스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수도가 되었다.

BC 1567년경 전승자로 유명한 파라오 아모스에게 약탈당했다. 근처에 발상지를 둔 19대 왕조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간에 히브리인들이 때때로 들어와 정착했다. 세티 1세(BC 1318~04)가 이곳에 궁전을 지었고, 파이앙스(유약을 바른 채색도기) 제조산업을 일으켰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람세스 2세는 군사적인 잠재력이 있는 이 도시로 수도를 옮겼으며, 그의 재임 초기에 대규모 사원들과 주택, 창고, 부두, 군사 시설 등이 건설되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1장 11절에서 이곳을 '보배로운 도시'라고 일컬은 이유도 당시의 발전상에서 비롯되었다. 시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아몬과 와지트라는 이집트의 신과 세트와 아스타르테라는 아시아의 신에게 각각 헌정되었다. 람세스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종교를 합치기 위해 애썼다. 시 중심부에서는 왕 자신에 대한 숭배의식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시는 또 왕이 거주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행정중심지로서 여러 정부 관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농업에 적합한 후배지가 있고, 강가라는 입지조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식량과 위락을 제공할 수 있었다.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의 이집트 제국에 적응하려고 한 이 도시는 20대 왕조 중반에 아시아 영토를 잃은 뒤 쇠퇴했고, 왕조가 끝날 무렵 북쪽으로 24㎞ 떨어져 있는 타니스 시가 페르라메수를 능가하여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21대조에서 왕의 거처가 타니스로 옮겨지자 쇠퇴는 절정에 달했다. 페르라메수산(産) 돌의 대규모 강탈사건과 재사용 결정으로 람세스 왕국의 수도 결정 문제는 더욱 큰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40년대에 이집트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 이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이 작업에 참여한 결과 람세스 2세의 수도가 이곳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고, 힉소스 왕조 시대의 이 도시의 모습도 밝혀졌다.

지도
페르라메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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