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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35경, 이란 투스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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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20(또는 1026경), 투스 |
국적 | 페르시아 |
요약
페르시아의 시인.
Firdawsī, Firdusi, Firdousi라고도 씀. 본명은 Abū ol-Qasem Manṣūr.
페르시아 민족 최대의 서사시 〈왕들의 책 Shāh-nāmeh〉의 저자이다.
이 책은 그 이전의 산문본에 기초를 두고 쓴 것이지만 그는 이 서사시에 최종적·영속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페르도우시는 고도(古都) 투스 교외에 있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세기가 흐르면서 이 시인의 이름을 둘러싸고 많은 전설들이 만들어졌지만 그의 실제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본인 스스로에 대한 언급 외에 유일하게 믿을 만한 자료는 1116(또는 1117)년에 페르도우시의 무덤을 찾아가서 그가 죽은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그의 고향에 떠돌던 전설들을 수집한 12세기의 시인 네자미 예 아루지가 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거의 6만 대구(對句)로 된 페르도우시의 시 〈왕들의 책〉은 주로 이 시인의 성년 초기에 그의 고향 투스에서 같은 제목으로 편찬된 산문작품에 근거하고 있다. 이 산문 작품〈왕들의 책〉은 대부분 신화시대부터 호스로우 2세(590~628) 통치시기까지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인 〈흐바타이 나마크 Khvatāy-nāmak〉라는 팔레비어(중기 페르시아어)로 씌어진 작품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7세기 중반 아랍인들이 사산 왕조를 정복한 이야기가 추가되어 실려 있다. 이 이슬람 이전의 전설적인 페르시아 연대기를 처음으로 운문화하려고 했던 사람은 다키키라는 사만 왕조의 궁정시인이었는데, 불과 1,000수를 마치고 그가 죽자 후에 페르도우시가 적절한 감사를 표하고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의 등장을 다루는 이 시들을 자신의 시에 반영했다.
1010년 마침내 완성된 〈왕들의 책〉은 당시 페르도우시의 고국 호라산에 왕조를 세운 유명한 술탄 가즈나의 마흐무드에게 증정되었다.
시인과 후견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로 전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네자미 예 아루지에 따르면 페르도우시는 직접 가즈나에 와서 대신 아흐마드 이븐 하산 메이만디의 친절한 주선으로 술탄이 자기 시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술탄 마흐무드는 시인에 대한 포상에 관해 메이만디 대신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과 협의했다. 그들은 페르도우시에게 5만 디르함을 주어야겠지만 그의 이단적인 시아파 교의에 비추어 이도 너무 많다고 했다. 편협한 수니파인 마흐무드는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결국 페르도우시에게 2만 디르함밖에 주지 않았다.
몹시 실망한 그는 목욕탕에 갔다가 나오면서 포카(맥주의 일종) 한 잔을 산 후 있던 돈 전부를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사람과 포카 파는 사람에게 절반씩 나누어주었다.
술탄의 격노가 두려워 처음에 그는 헤라트로 도망가서 6개월간 숨어 있었고 그후 그의 고향 투스를 거쳐 마잔데란으로 가서 사산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세파바드 샤레야르의 궁정에 피신했다. 여기서 페르도우시는 술탄 마흐무드에 대한 풍자시 100수를 지어 〈왕들의 책〉 서문에 집어넣고 샤레야르에게 낭독해 주었다.
동시에 이 위대한 작품을 마흐무드가 아닌 고대 페르시아 왕들의 후손인 그에게 헌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샤레야르는 마흐무드에게 헌시하도록 설득하고, 그에게서 풍자시 1수당 1,000디르함에 사서 이것을 그 책에서 지우게 했다. 네자미는 페르도우시가 풍자시의 원고를 없애버렸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6수만 남았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는 물론 전체 본문이 신빙성 있는 상태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노년에는 그가 부이 왕조의 보호 아래 페르시아 서부나 심지어 바그다드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을 것으로 오랫동안 추측되었다.
그러나 이 가정은 그가 요셉과 포리파르의 부인을 주제로 한 서사시 〈유소프와 잘리하 Yūsof o-Zalῑkhā〉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에 근거한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서사시는 페르도우시가 죽은 뒤 100여 년 후의 작품임이 판명되었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다시 네자미 예 아루지의 설명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술탄 마흐무드가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고 있던 중 그의 대신인 아흐마드 이븐 하산 메이만디가 〈왕들의 책〉에서 적절한 시구를 인용하여 페르도우시를 인색하게 대접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술탄은 마음을 고쳐먹고 가즈나로 돌아오자마자 6만 디나르에 해당하는 인디고를 페르도우시에게 주고 투스까지 왕실 낙타로 수송하도록 명령했다. 인디고는 안전하게 투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낙타들이 한 문으로 이 도시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페르도우시의 관(棺)이 다른 문으로 실려나가고 있었다. 투스에 있는 광신적인 전도사가, 페르도우시가 이슬람교도 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하여 그의 시체가 이 도시 성곽 밖에 있는 그의 정원으로 마지막 휴식처를 찾아 운반되는 중이었다.
페르도우시의 유족인 딸이 술탄의 선물을 고고하게 거절했다. 결국 그 돈은 투스 경계선의 휴계소를 수리하는 데 쓰였다. 네자미는 페르도우시 사망일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후에 권위자들의 제시한 가장 빠른 날짜는 1020년이고 가장 늦은 날짜는 1026년이다. 페르도우시가 80세 이상 살았다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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