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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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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3. 8. 16, 폴란드 보우오진
국적 이스라엘

요약 이스라엘의 정치가·국회의원(1959~). 본명은 Shimon Perski.

페레스(Shimon Peres)

ⓒ David Shankbone/wikipedia | CC BY-SA 3.0

시몬 페레스는 1950~70년대의 이스라엘 국방정책을 입안했고 1984~86년에는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34년에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키부츠에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47년 다비드 벤 구리온이 주도하던 유대인 방위기구인 하가나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벤 구리온은 시몬 페레스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총리에 취임한 벤 구리온은 당시 25세의 페레스를 이스라엘 해군의 총수로 앉혔다. 이 직위에서 2년간 일한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하버드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정치학·경제학을 공부했다. 1952년에는 국방부의 부국장으로 임명되어 국장, 국방차관을 지내면서 군비증강 계획을 실천에 옮겼고,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했으며, 해외 여러 나라들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특히 프랑스와의 군사동맹이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이다. 1965년 현직에서 물러나 벤 구리온이 창당한 라피당에 몸담았다. 이 당은 벤 구리온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레비 에슈콜에 대항하기 위하여 벤 구리온이 창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피당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7년의 6일전쟁의 여파를 경험한 시몬 페레스는 마파이당(벤 구리온이 전에 창설한 당)과 보다 좌경적인 노동당인 아두트아보다당 등과 자신이 속한 라피당을 합당하여 이스라엘 노동당을 만들었고 이 당의 부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페레스는 1974년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 내각의 국방장관직을 맡았다.

이 직위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자주국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스라엘 최초의 원자로 건설을 추진했다. 1977년 노동당의 당수가 되어 1977, 1981년 2차례에 걸쳐 총리직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메나헴 베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984년 선거결과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총리로 취임했다. 1984년 9월 시몬 페레스와 리쿠드당의 당수인 이츠하크 샤미르는 권력분담협정을 맺었다. 총 50개월에 달하는 총리의 임기 첫 25개월은 페레스가 총리를 맡고 샤미르는 부총리 및 외무장관으로 근무하며, 나머지 25개월 동안은 역할을 바꾸어서 한다는 것이었다. 페레스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태세로 국정을 수행했으며 1985년에는 레바논을 침공한 문제 많은 이스라엘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경제 침체의 요인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대폭적인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1988년 구성된 노동당과 리쿠드당의 연립정부에서 재무장관직을 맡기도 했으며, 1992년의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함에 따라 라빈 정부의 외무장관으로 입각했다. 오슬로 협정을 통해 중동에 평화를 가져온 공로를 인정받아 Y.라빈, Y.아라파트와 함께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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