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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8. 7. 14, 잉글랜드 맨체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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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8. 6. 14,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 공격적인 개혁가로 여성참정권 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사망한 해에 영국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죽던 해에 영국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부여받음으로써 그녀가 40년 동안 해온 운동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딸인 크리스타벨 해리어트(1880~1958, 후에 작위를 받음) 또한 여성참정권 운동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1879년 에멀린 굴든은 법률가이자 존 스튜어트 밀의 친구이며, 영국 최초의 여성참정권 법안(1860년대말) 및 1870, 1882년 2차례에 걸쳐 기혼여성 재산법안을 기안했던 리처드 마스덴 팽크허스트와 결혼했다. 10년 후 그녀는 여성참정권연맹을 창설하고, 1894년 지방 공직자 선거에서 기혼여성의 참정권을 확보했으며, 1895년부터 맨체스터 시의 공직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1903년 그녀가 맨체스터에 설립한 여성사회정치연맹(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WSPU)에 점점 더 힘을 기울였다. 이 연맹이 처음으로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1905년 10월 13일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애니 케니가 여성참정권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위해 자유당 회합을 무산시켰을 때였다. 당시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에게 체포되어 벌금형을 거부하고 대신 옥살이를 했다.
1906년부터 그녀는 런던에서 WSPU의 활동을 지휘했다. 자유당 정부를 여성참정권 운동의 주요장애물로 간주한 그녀는 선거 때 자유당 후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그녀의 동료들은 내각 각료들의 회합을 방해했다. 1908~09년 그녀는 3차례에 걸쳐 투옥되었는데, 그중 1번은 사람들에게 하원 점거를 호소하는 인쇄물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1910년에 그녀가 선언한 '휴전'은 정부가 여성참정권 조정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곧 파기되었다.
1912년 7월 WSPU는 극단적인 호전적 노선으로 운동을 전환했는데, 주로 방화를 저항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검거를 피해서 파리에 가 있던 크리스타벨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팽크허스트 자신은 투옥된 상태였다. 그녀는 단식투쟁을 하는 죄수들을 일시 석방하여 일정 수준까지 건강을 회복하도록 할 수 있다는 1913년의 죄수법(단식죄수가출옥법)에 따라 석방 및 체포를 1년에 12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복역한 기간은 총 30여 일 정도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녀와 크리스타벨은 참정권 운동을 중지했고, 정부는 참정권 운동 관련 죄수를 전원 석방했다. 이전에 여성참정권 강의를 위해 3차례 미국을 여행했던 그녀는 전쟁기간중 여성의 전시산업체 동원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캐나다·러시아를 방문했으며, 전후에는 몇 년 동안 미국·캐나다·버뮤다 등지에서 살았다. 1926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런던 동부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으나 건강이 쇠약해져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투표권을 인정한 1928년의 인민대표법이 그녀가 죽기 수주일 전에 통과되었다.
1914년에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My Own Story〉가 출간되었으며, 그녀의 둘째 딸인 E.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지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생애 The Life of Emmeline Pankhurst〉가 1935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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