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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9. 3. 21, 프랑스 리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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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0. 1. 19, 베르사유 |
국적 | 프랑스 |
요약
나폴레옹 3세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종결시킨 프랑크푸르트 조약 협상에 참가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 했던 펠리체 오르시니를 변호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1870년 9월 4일, 국가방위정부에서 L. J. 트로쉬 장군을 대통령으로 하여 파브르는 부통령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과 평화협상을 벌이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이틀 후 그가 발표한 선언 가운데 “한 치의 땅도, 요새의 돌멩이 하나도 독일에 양보하지 않겠다”라는 구절이 비스마르크의 반대를 불러일으켜, 알자스로렌 지역을 평화의 조건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871년 1월 28일 정부의 의견을 듣지도 못한 채 휴전조약을 이끌었다. 1871년 신망을 잃어 내각에서 사퇴했다.
나폴레옹 3세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종결시킨 프랑크푸르트 조약 협상에 참가했다.
1830년 혁명 때부터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로 선언했고 1849년 론 주 대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에 저항해 파리의 무장 가두투쟁 조직에 힘썼으며, 그후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 했던 펠리체 오르시니를 변호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1857년 파리 대표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제정 반대에 서명한 공화파 '5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63년 공화당 당수가 되었고 멕시코 원정과 로마 점령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때 행한 유창하고 완벽한 연설로 186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870년 9월 4일, 국가방위정부(임시정부)에서 L. J. 트로쉬 장군을 대통령으로 하여 그는 부통령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과 평화협상을 벌이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그가 1870년 9월 6일 발표한 선언 가운데 "한 치의 땅도, 요새의 돌멩이 하나도 독일에 양보하지 않겠다"라는 구절이 비스마르크의 반대를 불러일으켜 9월 19일의 페리에르 회의에서는 불가피하게도 알자스로렌 지역을 평화의 조건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1871년 1월 28일 군대의 상황을 알지도 못하고, 보르도에 있는 정부의 의견을 듣지도 못한 채 휴전조약을 이끌었다. 1871년 2월 8일 서로 다른 6개 선거구에서 국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때는 휴전협정에서 그가 한 일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그는 티에르에 의해 독일과의 최종적인 휴전협정을 위해 파견되었다. 마침내 1871년 8월 2일 신망을 잃어 내각에서 사퇴했고 그뒤로는 거의 은퇴한 것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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