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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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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의 본격적인 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졌다. 1607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일본에 사절을 보냈는데, 이것은 일본의 정세를 직접 견문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은 1636년 대등한 외교원칙에 의해 사신을 파견한다는 뜻에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일본 바쿠후의 장군이 바뀔 때마다 파견했는데, 1811년까지 총 9회 파견했다.
통신사 구성은 정사·부사·종사관을 포함하여 거의 500명에 달했다. 통신사는 바쿠후 장군에게 보내는 국서와 쓰시마 도주나 바쿠후의 관리들에게 전달하는 서계를 지참했다.
1811년 에도가 아닌 쓰시마 섬에서 국서를 교환했던 역지빙례를 마지막으로 통신사의 파견은 중단되었다.

통신사

통신사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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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선조 36)에 성립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체제 하에서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조선왕조 개국 이후부터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까지 62회에 걸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으며, 이때 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 외에 회례사(回禮使)·통신관·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했다. 반면 입국왜사(入國倭使)의 횟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이는 양국간의 사절파견의 근본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무역을 중심으로 한 절박한 경제문제로 조선에 여러 번 입국했고,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차별적인 외교원칙과 '금구'(禁寇)를 목적으로 한 정치적·외교적인 목적 때문에 일본의 사절보다 훨씬 적게 파견되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본격적인 외교의 전개와 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1607년에 조선이 일본에 보낸 사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國書)에 대한 회답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리고 오기 위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는데, 일본의 정세를 직접 견문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어 1617(광해군 9), 1624년(인조 2)의 사절도 회답 겸 쇄환사로서,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절파견이 상호간에 호의를 주고받는 의미보다는 몇 차례에 한정하여 정치적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은 도쿠가와 바쿠후를 정식 외교 당사자로 여기지 않았고, 강화를 위한 기반이 조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636년에 임진왜란 이후 양국간의 통교의 계기가 되었던 국서가 개작(改作)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커다란 현안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해에 청(淸)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남쪽의 일본과 관계를 온전히 하려는 입장이 강했고, 몇 차례의 사신을 통해 도쿠가와 정권에게 조선 재침입의 의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치른 지 40여 년이 경과했으므로 전쟁포로의 쇄환문제 등이 소멸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의 거듭된 통신사 파견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도 명·청 교체기의 국제 환경에 적극 대응하고, 외교를 통해 정권의 권위를 과시하여 국내 제후지배를 굳게 결손시키기 위해 조·일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로써 조선은 1636년 대등한 외교원칙에 의해 사신을 파견한다는 뜻에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양국간에 사행의 기능, 파견과 접대를 둘러싼 갖가지 절차와 내용을 점차 공식화시켰다.

이후 통신사는 원칙적으로 일본 바쿠후의 장군이 교체될 때마다 파견되었는데, 조선은 이를 내면적으로 별도의 정치적·외교적 현안을 해결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즉 통신사에 의한 바쿠후와의 직접 교섭에 의하여 도쿠가와 정권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일본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동시에 그때그때의 외교안건을 해결함은 물론 일본 국내의 정보수집을 통해 대일정책에 이용했다.

그리하여 1811년(순조 11)까지 9회(회답 겸 쇄환사 포함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

파견절차는 일본 바쿠후의 장군교체 사실이 결정되어 통신사 파견 요청이 오면 예조(禮曹)와 쓰시마 도주와의 연계 속에서 준비되었다. 통신사의 구성은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을 포함하여 거의 500명에 달했다. 통신사는 바쿠후 장군에게 보내는 국서(서계)와 그밖의 쓰시마 도주나 바쿠후의 관리들에게 전달하는 서계를 지참했다.

바쿠후 장군에게 보내는 국서는 조선 국왕의 명의로 되어 있었으며, 쓰시마 도주나 바쿠후의 관리에게 보내는 서계는 예조참판·예조참의·좌랑 등 상대의 지위에 상응하는 직명으로 되어있었다. 또한 통신사는 별폭(別幅)을 지녔는데, 여기에는 일본측 관계자에게 예물로 보내는 선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재했다. 통신사의 왕래일정은 한양-부산-쓰시마 섬-에도[江戶]에 이르는 노정을 왕복하는데 5~8개월이 소요되었다. 한편 일본 바쿠후의 통신사에 대한 접대는 대단한 규모였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 海遊錄〉에 따르면, 1719년(숙종 45)의 경우 통신사 일행의 선도와 경호를 위해 쓰시마 군사 1,300명이 동원되었고, 쓰시마 섬에서 에도 사이에서 직접 접대를 맡았던 다이묘[大名]는 33명이지만 그밖에 통신사행렬이 지나는 해로와 육로에 인접한 수많은 지방의 다이묘들이 예하 민을 국역 부과형식으로 동원했는데 그 수는 하루에 3,000명으로 방대했다. 바쿠후는 통신사의 왕복을 다이묘에 대한 군역과 인민에 대한 국역으로 융숭하게 영송했다.

1811년 통신사 사행단은 역지빙례제(易地聘禮制)로 변질되어 에도가 아닌 쓰시마 섬에서 국서를 교환했다. 당시 조선 국왕의 서계가 장군의 교체를 축하하고 그에 대한 해답 서계가 전달된 점에서 통신사 본래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통신사 일행과의 연도 제번(諸藩)의 교류도 없었고 장군의 알현도 없었던 것이다. 역지빙례를 마지막으로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되었는데, 이는 조선-중국-일본 사이의 국제관계가 다시 정립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양국 정부간 교류의 중요성이 감소된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통신사행에 소요되는 막대한 경비의 지출이 양국 공통의 내정문제로서 심각하게 재검토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 상층부·지식인 계급의 조선에 대한 멸시의식이 통신사문제의 처리에서 일조하고 있었다. 중세의 조·일관계는 평화적인 통교관계와 함께 왜구의 인상이 강했고, 이후 근대에 와서는 일본이 정한론(征韓論)을 시작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불행한 관계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조·일관계는 조선통신사로 대표되는 평화적인 통교관계가 계속되는 과정에서는 양국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다.

예를 들면 통신사와 일본 문인 사이에 행해진 성대한 '필담창화'(筆談唱和)에서 서화·시문·글씨 등의 교류가 나타나고 '당자(唐子)춤'·'조선가마' 등 일본의 민속, 특히 축제에 유입된 조선 풍속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의 통신사 파견은 양국간의 외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술·사상·예술의 여러 부분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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