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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기무아문

다른 표기 언어 統理機務衙門

요약 청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참조하고 군국기무까지 통괄할 정1품 아문을 설치하여 1880년 12월 <신설아문절목>에 근거하여 신설되었다. 사대사·교린사·군무사를 비롯한 12사를 두었다가 1881년 11월 7사로 축소했다. 그러나 1882년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삼군부의 부활과 함께 폐지되었다. 7월 대원군의 실각 후 기무처로 되었다가 기무처는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통리아문과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내무아문으로 분리되었다. 그해 12월 통리아문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통리내무아문은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은 의정부에 통합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교·통상 기능만으로 축소되고 전문기술적 부서들은 분설되었다. 분설된 기구는 6사로 개편되었다가 갑오개혁 때 외무아문으로 바뀌었다.

설치 목적은 개항 후 새로운 성격의 사무와 정세변화에 대처하려는 것으로, 삼군부(三軍府)를 계승한 위에 외교·군사 관계 전권을 부여했다. 통리기무아문의 시초는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이 청(淸)의 이홍장과 무비자강책을 논의한 후 1879년 변원규를 청에 파견하여 신무기제조법의 학습, 즉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를 요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청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참조하고 군국기무까지 통괄할 정1품 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880년 12월 21일 〈신설아문절목〉에 근거하여 신설되었는데, 사무 분담을 위해 사대사(事大司)·교린사(交隣司)·군무사·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군물사(軍物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전선사(典選司)·이용사(理用司) 등 12사를 두었다. 수석인 총리대신은 현직 대신이 겸하게 했고 실무진은 당상·낭청·참사(參事) 등으로 편성했다. 초대 총리대신은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이었고, 김보현(金輔鉉)·민겸호(閔謙鎬)·김병덕(金炳德)·김홍집(金弘集) 등 10명이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1881년 우선 영선사(領選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각각 청과 일본에 파견했고, 별기군을 창설하여 신식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다음해에는 미국과의 통상수호조약 체결을 담당하고 무위영·장어영(壯禦營)의 신설 등 군제를 개편했다. 1881년 11월 신사유람단 위원들을 중심으로 기구 개편에 착수하여 12사를 동문사(同文司)·군무사·통상사·이용사·전선사·율례사(律例司)·감공사(監工司)의 7사로 축소했다. 그러나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삼군부의 부활과 함께 폐지되었다. 같은 해 7월 대원군이 실각하자 기무처(機務處)로 된 데 이어 11월 기무처는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통리아문과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내무아문으로 분리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다시 통리아문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통리내무아문은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되었고 이러한 개칭이 있기 직전 독일인 고문인 묄렌도르프가 초빙되었다. 이러한 개편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인 대외·통상 관계를 전담하는 기구로 발전했으나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은 의정부에 통합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기능이 외교·통상만으로 축소되고 전문기술적 부서들은 분설되었다. 분설된 기구는 1887년 4월 총무사(總務司)·통상사·교섭사·번역사·기록사·회계사 등 6사로 개편되었고, 갑오개혁 때 외무아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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