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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청빈 서원을 하고, 노동과 자선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여러 로마 가톨릭 수도회.
현재 남아 있는 탁발수도회로는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카르멜 수도회, 삼위일체 수도회, 구속주회, 성모의 종 수도회, 미니모회, 하느님의 성 요한 구호 기사단, 튜튼 기사단 등을 들 수 있다.
탁발수도회를 창설한 위대한 두 사람은 1216년 도미니코 수도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코(1170경~1221)와 1210년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이다. 그들이 죽은 지 한 세대도 채 안 되어 이 두 수도회는 유럽 전역과 아시아로 퍼져나갔고, 수사들의 수는 늘어나 수만 명에 달했다. 서유럽의 모든 대도시 곳곳에 탁발수도회가 세워졌으며, 대학에서는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과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신학을 가르쳤다.
이 두 수도회에 이어 13세기에는 카르멜 수도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성모의 종 수도회 같은 큰 탁발수도회가 생겨났다.
청빈사상은 성 프란치스코의 근본 사상으로, 성 도미니코와 다른 탁발수도회 창설자들도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사상을 모방한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논란이 되기도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걸식과 자선금이 수사들의 생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수사들이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노동으로 생계비를 마련할 수 없을 때만 구걸에 나서라고 했다. 그러나 수사들은 얼마 안 가서 거의 다 영적 사역에 전념하는 성직자들이 되었고, 수도회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그들이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마련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성 프란치스코가 애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구걸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수사들이 최대한 청빈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하며, 토지나 고정 자산, 고정 수입원을 갖지 말고 최소한의 소지품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그러한 이상이 완화되거나 폐기되기도 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계속된 개혁과 새로운 출발에 의해 그 원칙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성공은 잠시일 뿐, 얼마 안 가서 냉혹한 현실 때문에 원칙이 포기되는 것이 상례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갈라져 나간 카푸친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지켜나갔으나 그들 가운데서도 일정한 정도의 완화조치는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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