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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2. 7. 4, 미국 버몬트 플리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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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3. 1. 5, 매사추세츠 노샘프턴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제30대 대통령(1923~29 재임).
국내 및 국제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쿨리지 공화당 행정부의 보수주의적 정책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대공황까지의 미국정책을 상징한다. 캘빈 쿨리지가 자라난 뉴잉글랜드적 분위기는 검소와 절제 및 겸손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평생 동안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캘빈 쿨리지는 1897년 노샘프턴에서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2년 뒤 시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들어갔다. 그후 노샘프턴 시장과 주 상원의원 및 부지사를 비롯한 여러 공직을 거치고 1918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1919년 9월 보스턴 경찰의 파업으로 이틀 동안 폭동과 혼란이 야기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주 방위군을 출동시킴으로써 쿨리지는 전국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쿨리지를 찾아가서 파업 경찰관들이 원대복귀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요구사항들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특유의 간결한 말투로 그 요구를 거절했다. "어느 누구도, 언제 어디에서도, 대중의 안전을 담보로 파업할 권리는 없소."
192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제1차 투표에서 캘빈 쿨리지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는데, 이것은 워런 G. 하딩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공화당 수뇌들에게 앙갚음하려는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하딩과 쿨리지는 '정상으로 돌아가자'는 선거공약으로 쉽게 승리했다. 1923년 8월 2일 하딩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대통령직에 오른 쿨리지는 분열된 당과 다루기 힘든 의회, 여러 가지 추문으로 말미암아 국민의 불신을 받게 된 행정부, 그리고 국내외 정책의 절박한 문제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캘빈 쿨리지는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행정을 개혁하고 정부의 정직성을 회복시켰으며, 당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여 1924년 쉽게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쿨리지는 문제를 최소화하고 안전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전통적인 제도를 자랑스럽게 강조함으로써, 차분하고 실제적인 지도자의 상징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쿨리지는 '쿨리지와 함께 냉정을 유지하자'는 선거구호를 내세워, 주로 진보적인 제3당 대통령 후보인 로버트 라폴레트의 '위험한 급진주의'를 공격하는 개혁반대 운동을 벌인 끝에 1924년 선거에서 쉽게 승리했다.
캘빈 쿨리지의 통치시기는 위기도 없고 뛰어난 정치 지도자도 없으면서 경제적 번영이 눈에 띄게 확대되었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기업과 산업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쿨리지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기업과 산업을 규제하는 기관은 기업을 돕는 기관으로 탈바꿈했고, 세금감면 정책은 자본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높은 보호관세율이 유지되었다. 쿨리지는 농가에 실질적인 보조금을 지급하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에게 특별수당을 주자는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의회는 그가 거부한 특별수당 지급법안을 1924년에 통과시켰다. 쿨리지는 맥네어리와 호건이 발의한 농가보조법안을 1927, 1928년 2차례에 걸쳐 거부했다.
캘빈 쿨리지는 이론적으로는 외국과의 선린관계 및 평화·군비축소를 지지하면서도 국제분쟁에 말려들지 않는 초연한 외교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일반대중의 견해를 반영했다. 쿨리지는 1928년 대통령 후보 재지명을 거부하고 노샘프턴으로 은퇴하여 1929년 자서전을 쓰는 한편, 이따금 공공문제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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