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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상인이었다. 1491년 크라쿠프대학교에 입학해 천문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494(또는 1496)년에 집으로 돌아왔다. 에르미란트의 주교로 새롭게 선출된 그의 외삼촌 르차스 바첸로데는 코페르니쿠스가 플라우엔부르크의 성당참사회원이 되어 일생 동안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기를 원했다.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외삼촌은 1497년 그를 볼로냐대학교로 보냈으며, 그곳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독일 학생들과 교분을 쌓았다. 3년 6개월 동안 그는 그리스어와 수학, 플라톤의 저서들을 공부했고 당대의 천문학 사상에 보다 친숙해졌다. 또한 그는 볼로냐에서 1497년 3월 9일에 달이 알데바란별을 가리는 현상을 관측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같은 해 플라우엔부르크의 성당참사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500년 대성년(大聖年)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를 여행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수학 강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당 간부들로부터 자신의 직위를 승인받기 위해 1501년 플라우엔부르크를 잠시 방문했다가, 파도바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다른 폴란드 학생들과 함께 법률과 의학을 공부했다. 1503년 페라라대학교에서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던 잠깐 동안의 공백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4년을 파도바에서 보냈다. 1503년 폴란드로 돌아오자 곧 크라쿠프를 방문하여 1512년 그의 삼촌이 죽을 때까지 삼촌의 고문관으로 활동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플라우엔부르크에 영구히 정착하고 성당참사회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의술을 특히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와 파도바에서 공부하면서 수학·천문학·의학·신학에 있어서 당대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으며, 천문학적인 연구를 위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광범위하게 관측하지 못했지만, 지구 주위를 도는 태양·달·행성 들의 추정된 궤도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다시 계산해낼 수 있었다. 그는 1497~1529년에 행해진 27가지 관측결과들을 출간했다.
천문학을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로서 그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1514년에는 당시 교회 권위자들의 정기총회인 라테란 공의회에 계류중이던 달력개혁에 관한 그의 의견을 제시하도록 초빙되었다. 그러나 그는 해와 달의 위치가 적절히 재평가될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떠한 분명한 견해도 밝히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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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코페르니쿠스의 교육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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