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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9. 8. 21, 프랑스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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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7. 5. 23, 소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수학자.
해석학과 치환군(한 집합의 순서수열들을 원소로 하는 군)을 개척한 근대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공포시대(1793~94)의 개시로 가족이 파리에서 아르쿠일 마을로 도피했을 때 그곳에서 코시는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 화학자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를 처음 만났다. 코시는 군사공학도가 되어 1810년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 함대를 위한 항만 및 방어공사를 위해 셰르부르로 갔다.
작업량에도 불구하고 그는 볼록다면체의 모서리수·꼭지점수·면수 사이의 관계를 세운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가 제시한 문제의 답과 다각수(多角數)에 관한 피에르 드 페르마 문제의 답이 들어 있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코시가 1813년 파리에 돌아왔을 때,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그에게 수학에 전력을 다하라고 설득했다. 다음해 그는 정적분에 관한 소논문을 발표했는데, 정적분은 복소함수론의 기초가 되었다.
1816년부터 그는 파퀼테 데 시앙스, 콜레주 드 프랑스와 에콜 폴리테크니크(모두 파리에 있음)에서 교수로 지냈다. 가스파르 몽주가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정치적 이유로 쫓겨나자(1816), 코시가 빈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같은 해에 파동전파에 관한 논문으로 프랑스 학술원 대상을 받았는데, 이는 유체역학의 고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22년 탄성 수학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코시가 명백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수학에 미친 큰 업적은 대부분 세 논문 〈에콜 루아얄 폴리테크니크의 해석학 과정 Cours d'analyse de l'École Royale Polytechnique〉(1821)·〈무한소 미적분학 Résume des leons sur le calcul infinitesimal〉(1823)·〈무한소 미적분학의 기하학에의 응용에 대한 강의 Le
o ns sur les applications du calcul infinitésimal à la géométrie〉(1826~28)에 담겨 있다.
수학에서 근대적 정밀함의 양상은 1820년대 처음 그의 강의와 해석학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미적분학의 원칙들을 분명히 했고, 해석학의 필수개념인 극한과 연속의 개념들을 이용해 미적분학의 원리들을 개발하여 기초를 튼튼히 했다. 복소수 변수(-1의 제곱근의 배수들을 포함하는 변수)의 함수론도 같은 시기에 발달시켰으며 이는 오늘날 물리학에서 항공학까지 이르는 응용수학에 필수적인 것이다.
비록 고귀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했다고 하지만 코시는 가끔 독선적인 완고함과 공격적인 종교적 편협함 때문에 동료들에게 반감을 샀다. 1830년 찰스 10세가 망명하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즉위하자 코시는 충성의 맹세를 하는 대신 망명을 했다. 토리노대학교에서 그를 위해 수리물리학 교수자리가 마련되었지만 1833년 찰스 10세의 손자인 보르도 공작을 개인지도하기 위해 갔다.
1838년 서약을 하지 않아도 되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에콜의 교수가 되었다. 코시는 정수론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오차론에 관한 3편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천문학에서 그는 르 베리에보다 소행성의 팔라스 운동에 대해 더 간단하게 계산했다. 광학에 대한 그의 연구 중에는 한때 빛의 전파매체라 생각되어 어디에나 있다고 여겨진 가상의 매개체인 에테르의 성질에 대한 수학적인 기초를 제공한 것이 있다.
그의 연구를 모은 〈코시의 업적 Oeuvres complètes d'Augustin Cauchy〉(27권, 1882~1970)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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