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위치 | 아르헨티나 중부 코르도바 주 |
---|---|
인구 | 1,572,000명 (2020 추계) |
면적 | 576㎢ |
대륙 | 남아메리카 |
국가 | 아르헨티나 |
요약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주의 주도.
아르헨티나에서 2번째로 큰 도시로 팜파스 북서 연변의 평지와 코르도바 산맥의 산기슭이 접하는 해발 427m 지점의 프리메로 강 연안에 있다.
1573년 6월 당시 투쿠만의 총독이었던 헤로니모 루이스 데 카브레라는 대서양을 지나 스페인으로 갈 발판으로 삼기 위해 새 도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그 장소를 찾아 스페인에 있는 같은 이름의 주와 도시 이름을 본떠 코르도바데라누에바안달루시아로 이름지었다.
해안과 내륙의 부락들 사이에 있다는 입지적 요건이 코르도바의 초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페루 부왕령(副王領)의 일부로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17세기말에는 투쿠만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1599년 예수회 선교단이 정착하여 인디언들을 교화하고 그들과 함께 일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내륙 부락들 사이에 행해지는 불법적인 무역을 막기 위해 부왕청(副王廳)은 1622년 이곳에 세관을 설치했다.
17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여 지금의 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볼리비아 남부를 포함하는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생기면서 코르도바의 경제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1783년 스페인은 부왕령 안에 8개의 중앙집권화된 행정상의 주를 만들고 코르도바를 그 가운데 한 주의 주도로 만드는 보우르본 감독체계를 제도화했다.
1810년의 5월 혁명중에 옛 부왕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스가 이끈 왕당파가 코르도바에 모여 추방당한 페르난도 7세를 지지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사정권에 대항했다. 저항군은 격멸되고 리니에르스와 코르도바 총독 후안 구티에레스 데 라 콘차가 처형되었지만 코르도바는 강력한 중앙 정부의 과세에 대한 항쟁을 계속했다. 이 항쟁은 18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1866년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댐들 가운데 하나인 산로케 댐이 프리메로 강에 세워지고 1869년 동부에 연결되는 철도가 완성됨으로써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댐은 그후로 계속 보수·개량되었으며, 이 댐에 의해 조성된 호수는 현재 코르도바에 식수를 공급하고 과수원과 밀밭을 관개하며, 수력발전으로 코르도바 시의 가죽·섬유·자동차·유리·식품가공 등의 산업에 쓰이는 전력을 공급한다.
종교적 보수주의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충성 때문에 코르도바는 19세기와 20세기초 보수주의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0년대에 이 도시는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법률 제정에 강력히 반대했다. 교회에 대한 지지 기반은 20세기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페론주의자들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1955년 에두아르도 로나르디 장군의 코르도바 점령을 촉발했고, 결국 후안 페론 대통령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 도시는 20세기에는 노동행동주의의 중심지가 되었고, 1912년 이후로는 아르헨티나 산업 노동력의 규모와 다양성을 반영하면서 급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69년 5월 코르도바에서 노동자들의 격렬한 동맹파업인 코르도바소가 발생하여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그결과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정부가 물러나고 1973년 페론 정부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코르도바에는 옛 시의회 의사당, 18세기에 건립된 부왕궁전, 1758년에 세워진 대성당, 1714년에 시작된 산타테레사 수도원 교회 등 식민지시대의 유산이 풍부하다.
산마르틴 광장은 아르헨티나의 해방자를 기념하는 광장이다. 도시의 역사와 근처의 산맥에 있는 여름휴양지들로 관광업이 발달했다. 팜파스와 북서부의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아르헨티나 중부의 철도와 고속도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대식 시설을 갖춘 비행장인 파하스블랑카스가 근처에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