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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5. 11. 20, 미국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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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8. 6. 6, 로스앤젤레스 |
국적 | 미국 |
요약
그의 형 존 F. 케네디 행정부(1961~63)에서 법무부장관과 대통령 고문을 지냈다. 후에 연방상원의원(1965~68)으로 대통령 후보지명을 위한 선거유세중 암살당했다.
1961년 형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내각의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3년 11월 22일 그의 형 존 F. 케네디가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그후에도 계속 법무장관으로 근무하다가 1964년 사임했다. 그는 역량있는 법무장관이었다. 이후 1964년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쉽게 당선되었다. 그후 2년이 채 못 되어 그는 자신의 힘으로 중요한 정치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1968년 3월 16일에 대통령 선거 출마의사를 밝혔다. 6월 5일 자정 조금 지나서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그의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한 후 그가 주방 통로를 이용해 호텔을 떠나려고 할 때, 팔레스타인 이민자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그의 형 존 F. 케네디 행정부(1961~63)에서 법무부장관과 대통령 고문을 지냈다.
후에 연방상원의원(1965~68)으로 대통령 후보지명을 위한 선거유세중 암살당했다.
로버트는 하버드대학교 재학중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해군에서 복무하기 위해 휴학했다가 복학 후 1948년에 졸업했다. 1951년 버지니아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학학위를 받았으며, 그 다음해에는 그의 형 존의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성공적으로 관리하면서 매사추세츠 주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53년 조지프 R. 매카시가 이끄는 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의 차석 법률고문으로 있으면서 전국적으로 처음 이름을 날렸다(그는 1953년 중반에 사임했다가, 1954년 상원의 민주당 소장파의 법률고문으로 복귀했음). 1957년 그는 노동계의 횡령사건을 수사하는 상원 특별위원회의 수석 법률고문으로 있었는데, 그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와 트럭 운전사 조합장 제임스 R. 호파와의 사이에 장기간에 걸친 반목이 시작되었다. 1960년 그는 그의 형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지휘하기 위해 그 위원회의 위원직을 사임했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내각의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3년 11월 22일 그의 형 존 F. 케네디가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그후에도 계속 법무장관으로 근무하다가 1964년 9월 사임했다. 그의 형이 죽고 난 후 몇 개월 동안은 그에게 있어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그는 법무부를 44개월 동안 지휘하면서 많은 것을 개선시킨 법조계 정치가로 알려졌다. 1961년 5월 20일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한 무리의 폭도가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과 약 1,200명 정도 되는 그의 지지자들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위협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400명의 연방보안관들을 보내어 그들을 보호했다.
그후 발생한 인종분규 시기 동안 그는 남부지역의 보안관들과 지역안정전략을 짜내기 위해 장시간에 걸친 전화통화를 했다. 또한 그는 조직 범죄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기발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의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 중의 하나는 호파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수 있는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부를 떠날 때, 3년 전 그의 임명을 비난했던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는 논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요직에 탁월한 사람들을 임명했고, 행정적인 조치를 통하여 민권보호에 새로운 열기를 불어넣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민권법을 만들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케네디는 도덕규범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내부의 적 The Enemy Within〉(1960)·〈정의로운 친구와 용감한 적 Just Friends and Brave Enemies〉(1962)·〈정의의 추구 Pursuit of Justice〉(1964) 등을 저술했다.
그는 1964년 11월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쉽게 당선되었다. 그후 2년이 채 못 되어 그는 자신의 힘으로 중요한 정치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진보적인 민주당원들의 수석대변인이 되었고, L. B.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1968년 3월 16일에 대통령 선거 출마의사를 밝혔다.
그후 6월 4일 사건이 나던 바로 그날 캘리포니아 주에서 승리한 것까지 합하여 6개주 대통령 예비선거 중 5개주에서 승리했다. 6월 5일 자정 조금 지나서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그의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한 후 그가 주방 통로를 이용해 호텔을 떠나려고 할 때,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이라는 팔레스타인 이민자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앨링턴 국립묘지의 그의 형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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