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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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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4. 4. 28, 북로디지아 킨살리 근처 루브와
국적 잠비아

요약 잠비아의 정치가.

케네스 카운다(좌)와 헤이스팅스 반다(우)

Kenneth Kaunda and Hastings Kamuzu Banda

ⓒ wikimedia commons | CC BY

잠비아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1964년 잠비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버지는 니아살란드(지금의 말라위) 출신으로 교사였다. 어머니 역시 교사였는데, 그녀는 식민지인 잠비아에서 교사가 된 최초의 아프리카 여성이다. 그의 부모는 잠비아 북부에 거주하는 벰바족 사회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카운다는 이곳에서 1940년대초까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쳤다. 식민지인 잠비아에서 카운다는 중류층에 상당하는 지위를 획득한 대다수 아프리카인들처럼 교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잠비아에서, 1940년대 중반에는 탕가니카(지금의 탄자니아)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49년 잠비아로 돌아온 카운다는 진보적인 백인 이주민이며 북로디지아 의회의 의원인 스튜어트 고어 브라운 경의 통역사 겸 아프리카 문제 자문관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 기술과 식민정부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으며, 이것들은 이후 그가 북로디지아 최초의 반식민조직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ANC)에서 활동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ANC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조직되었던 아프리카 복지사회연맹(Federation of African Welfare Societies)에서 시작되었다.

1946년에 출범한 아프리카 복지사회연맹은 2년 후인 1948년 명백한 정치기구인 북로디지아 의회로 발전했고, 1951년에는 ANC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0년대초 카운다는 ANC의 하부조직과 긴밀히 접촉했다. 1958~59년 ANC의 지도부가 전략적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하자 카운다는 ANC의 주요조직들을 규합하여 잠비아 아프리카 민족의회(Zambia African National Congress)를 신설했다.

카운다는 이 신설된 조직의 위원장이 되어 능숙하게 조직을 운영했다. 그는 영국이 남로디지아·북로디지아·니아살란드 등 중앙 아프리카 3개 식민지를 통합하여 연방을 구성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군사정책을 수립했다. 아프리카인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가 되든 연방은 소수의 백인 이주민들이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도록 조직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러한 연방 수립에 반대했다. 카운다는 자신의 '적극적인 비폭력운동', 즉 연방 수립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잠비아 의회를 이용했다. 카운다의 비폭력운동은 결과적으로 2가지 중요한 성과를 가져왔다.

첫째, 영국 정부는 연방정책을 수정했고, 마침내 이 정책을 철회하기로 합의했다. 둘째, 카운다를 비롯해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다른 군사지도자들이 잠비아의 국가적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1960년을 기점으로 잠비아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카운다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1960년 1월 8일 식민정부는 카운다를 석방했다.

같은 해 1월말 그는 통일국가독립당(United National Independence Party/UNIP)의 총재로 선출되었는데, UNIP는 1959년 10월 호전적인 민족주의자인 마인자 코나가 ANC에 회의를 느끼고 설립한 조직이었다. 1960년 6월 UNIP는 30만 명에 달하는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다. 이같은 당세 확장에도 불구하고 UNIP는 식민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봉쇄할 수 없었으며, 특히 식민정부에 의해 지위를 보호받고 있는 지방 추장들은 UNIP의 강력한 적대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정부는 곧 UNIP의 지도자들이 잠비아 국민들 사이에서 정당성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0년 12월 식민정부는 카운다 및 UNIP의 다른 몇몇 지도자들을 런던에서 개최되는 연방평가회의에 초청하여 중앙 아프리카 3개 식민지의 정치적 지위에 관해 논의했다. 1961년초 영국 정부는 잠비아에서 공식적인 자치독립작업이 시작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잠비아의 독립을 위한 절차와 과정은 약 7만 7,000명의 유럽계 이주민 집단과 1만 1,000명의 아시아계 집단의 존재로 인해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 두 집단은 잠비아의 독립을 지연시켜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들과 잠비아 국민 간의 대립을 해결하는 데 있어 시종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했다. 1961년 도시지역에서 반(反)백인폭동사태가 널리 확산되긴 했지만, 그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잠비아의 흑인이 이 두 집단에 대해 품고 있는 뿌리 깊은 적대감정을 완화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1962년 10월 최종적인 독립 실현으로 이어지는 최초의 주요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유럽계 이주민에게 차등적인 투표권을 부여한 법안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 2개의 주요 아프리카 정당인 UNIP와 ANC가 다수표를 획득했다. 특히 UNIP는 새로운 의회에서 총 37의석 가운데 15석을 확보해 집권당이 되었다.

카운다의 지도력은 UNIP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당시 유럽 이주민들은 잠비아에 아프리카인 정권이 수립되면 자신들의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받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카운다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이를 완화시켰다. 또한 그는 잠비아의 아프리카인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파벌주의를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잠비아의 법제도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협상을 전개했고, 1964년에는 영국으로부터 잠비아의 독립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카운다는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후에 많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심각한 부족(部族)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협상을 벌였고, 부족간의 전쟁을 미리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적 폭력사태와 문제가 일어나자 1973년 그는 1당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1976년 국내의 경기가 침체되고 앙골라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그는 긴급권을 발동했다. 로디지아인들의 투쟁으로 인해 잠비아에 확산되고 있던 사회적 불안, 경제적 붕괴, 해상으로 연결되는 통신로의 파괴, 정치적 경합 등의 불리한 여건 속에 1978년 1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카운다는 80%를 득표하여 5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그후 수년 간 몇 차례에 걸쳐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83년 그는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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