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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령기초위원회

다른 표기 언어 Ordainer , 勅令起草委員會

요약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2세에 반대하여 왕실과 그 권력을 규제하기 위한 칙령의 기초를 마련한 위원회.
정식 명칭은 Lord Ordainer.

21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되었다. 1307년 에드워드 2세가 즉위하자마자 갈등이 시작되었다. 왕은 정치적 수완이 없었고 1309년 7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반대파의 우두머리가 되자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다.

1310년 2월경 토머스는 워릭·헤러퍼드·펨브로크의 백작들과 함께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에드워드가 유산을 낭비하고 나라를 망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후 왕은 1312년 성 미카엘 축일 이전에 정부 개혁 조례를 준비하도록 8명의 백작, 7명의 주교, 6명의 남작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또다시 실패함으로써 권력이 약해진 에드워드는 1311년 8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칙령기초위원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여기서 약 40개 조항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칙령은 우호적이며 매우 전통적인 논조를 띠고 있었다. 칙령기초위원들은 헨리 3세 시대의 선례를 참조했고 '의로운 백작' 시몽 드 몽포르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왕은 사악한 조언자들을 멀리하고 선한 조언자들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선한 조언자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칙령기초위원들이었다.

에드워드는 귀족들과 특히 그들이 의회 내에서 구성한 기구들을 따라야 했으며, 정책 결정과 인사 임명은 바로 이러한 기구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종장과 왕실 의상 관리인을 비롯해 왕의 시중을 드는 모든 관리들은 칙령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해야 했고, 장차 모든 의회의 귀족 위원회는 왕실 관리들에 대한 불만을 접수하게 되었다. 칙령 제20조는 에드워드가 총애하던 피어스 개버스턴을 특별히 따로 언급하면서, 왕의 모든 영토에서 그를 영원히 추방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위원들은 만약 왕실의 수입을 제대로 관리하기만 한다면 왕은 백성들에게 계속 재정 부담을 지우지 않고도 자체 수입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이 칙령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준수할 의향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왕과 귀족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유배생활 도중에 들어온 개버스턴은 개혁자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마침내 다시 평화가 이루어졌으나 에드워드는 배넉번 전투(1314. 6. 24)에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참패함으로써 랭커스터와 극단적인 위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들은 그후 1322년 에드워드의 새 측근세력인 더스펜서 부자들에 의해 전복될 때까지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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