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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982년에 3성체제가 도입되어 내사성·문하성·상서성이 설치되었는데, 기능이 밀접한 내사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내사문하성이 되어 최고정무기관으로 기능했다. 최고정치기구로서의 중서문하성의 권한과 지위는 고려 후기에 오면서 도병마사의 후신인 도평의사사로 옮겨갔다. 무인집권기 이후 도병마사의 기능이 확대된 데다가, 특히 1279년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면서 그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강화되어 의정기관인 동시에 국가 서무를 직접 관장하는 행정기관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중서문하성은 고려 후기에 들어 이전의 기능을 찾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 명칭만 자주 바뀌었다.
982년(성종 1)에 3성체제(三省體制)가 도입되어 내사성(內史省)·문하성·상서성(尙書省)이 설치되었는데, 기능이 밀접한 내사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내사문하성이 되어 최고정무기관으로 기능했다.
1061년(문종 15)에 내사성이 중서성으로 개칭되면서 중서문하성으로 되었다. 관원으로는 종1품에 문하시중(門下侍中)·중서령(中書令)이 각 1명씩, 정2품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문하평장사·중서평장사가 각 1명씩, 종2품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각 1명씩, 정3품으로 좌·우 산기상시(散騎常侍)가 각 1명씩, 종3품으로 직문하(直門下)가 1명, 정4품으로 좌·우 간의대부(諫議大夫)가 1명씩, 종4품으로 급사중(給事中)·중서사인(中書舍人)이 각 1명씩, 종5품으로 기거주(起居注)·기거랑(起居郞)·기거사인(起居舍人)이 각 1명씩, 정6품으로 좌·우 보궐(補闕)이 각 1명씩, 종6품으로 좌·우 습유(拾遺)가 각 1명씩, 종7품으로 문하녹사(門下錄事)·중서주서(中書注書)가 각 1명씩 있었다.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6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6명, 주보(注寶) 3명, 대조(待詔) 2명, 서예(書藝) 2명, 시서예(試書藝) 2명, 기관(記官) 20명, 서수(書手) 26명, 직성(直省) 8명, 전리(電吏) 180명, 문복(門僕) 10명 등이 있었다.
중서문하성은 상·하 2중으로 조직되어 그 구성이나 기능이 상이했다. 관품상 2품과 3품을 획선으로 하여 정사를 의논·처리하는 상층조직인 성재(省宰)와, 간쟁(諫諍)·봉박(封駁)을 맡은 하층조직인 성랑(省郞)으로 조직되었다. 성재와 성랑은 권력구조상 주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상층부를 구성하는 성재의 비중이 더욱 컸다.
성재는 재상(宰相)·재부(宰府)라고도 일컬어지는데, 국왕과 더불어 정사(政事)를 의논·처리하는 의정기능뿐만 아니라 그 집행기관인 상서(尙書) 6부의 판사(判事)까지 겸임하여 국정전반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리하여 종1품의 문하시중이 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고려의 수상이 되었다. 그 밑에는 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가 차례로 각기 맡은 일을 보았다. 이들 중요관직은 사서(史書)에 흔히 보이는 재오(宰五)로 불렸다.
또 하나의 종1품인 중서령은 종친에게 수여한 명예직이거나 일반신하에게 수여한 치사직(致仕職), 또는 죽은 뒤 주는 증직(贈職)으로 실직에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재부는 종1품의 문하시중을 수반으로 하여 일원적인 조직이 되어 있었다. 중서령을 실직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에 의하면 재오는 문하시중·중서령·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이 된다.
성랑은 낭사(郞舍)라고도 하는데, 정3품 이하에서 종6품까지의 1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서문하성의 종7품인 문하녹사와 중서주서는 낭사에 관한 사무를 맡을 뿐 낭사에는 속하지 못했다. 낭사는 간관(諫官)으로 자기들의 상관인 성재들까지도 탄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재부와 낭사는 제도상으로는 같은 관청의 상하관계에 있지만, 실제로는 기능이 상이하여 별개의 기관과 같았다.
따라서 재부는 의정의 기능을 갖고 있는 중추원(中樞院:樞密院)과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처리하여 재추양부(宰樞兩府)로 불렸으며, 낭사는 어사대(御史臺)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일컬어지며 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의정기관과 간쟁기관이 같은 관청에 있으면서도 그 기능은 엄격히 분리되는 독특한 제도를 이루고 있었다.
최고정치기구로서의 중서문하성의 권한과 지위는 고려 후기에 오면서 도병마사(都兵馬使) 후신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옮겨갔다.
무인집권기 이후 도병마사의 기능이 확대된데다가, 특히 1279년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면서 그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강화되어 의정기관인 동시에 국가 서무를 직접 관장하는 행정기관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중서문하성은 고려 후기에 들어 이전의 기능을 찾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 명칭만 자주 바뀌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서성과 합쳐져 첨의부(僉議府)로 고쳐졌고, 1293년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개칭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문종대의 관제를 복구할 때 상서성이 분리되고 중서문하성이 부활되었으나, 이전의 기능을 복구하지는 못했다. 1362년에 다시 도첨의부(都僉議府)로 개칭되고, 1369년에 문하부(門下府)로 고쳐져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중서문하성의 기능을 이어받았던 도평의사사는 1400년(정종 1)에 의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와 간쟁기관인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리되었다.→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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