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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종교적·금욕적·영양학적 이유로 채소·과일·곡물·견과류만을 먹는 일상습관 또는 주의.
모든 채식주의자는 수육류·가금류·어류를 먹지 않으나 우유나 유제품을 먹는 사람도 있다. 현대 서양의 채식주의자는 일반적으로 달걀을 먹지만, 대부분의 인도 채식주의자는 고대 지중해 지역 사람들처럼 달걀도 먹지 않는다. 육류제품을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는 절대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유제품을 먹는 사람은 유란채식주의자라고 한다. 그밖에 부유층을 제외한 육류 섭취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여러 농민들이 채식주의자로 다소 잘못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의 채식주의
고기 섭취를 고의로 기피한 것은 처음에는 일시적인 정화나 성직자의 기능에 대한 자격부여 등 종교의식과 관계되어 이따금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이 금육식사를 옹호한 것은 BC 1000년 중엽 지중해 동부지역과 인도에서 철학적 자각의 일부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각각 시작되었다.
지중해 지방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사모스의 피타고라스(BC 530경)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피타고라스파(派)는 고기뿐만 아니라 콩과 아욱까지도 먹지 않는 특정 신비교 의식의 금기를 일반화시켰는데, 이는 이집트 사제의 관습이나 비옥한 초승달지대(나일 강, 티그리스 강, 페르시아 만을 잇는 반월형의 농업지대)에 살던 개인적 사상가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피타고라스파는 인간이 모든 동물들과 동족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인간의 박애심을 강조했으며, 다른 동물을 음식물로 하기 위해 죽이는 것을 금지했다.
플라톤 이후의 많은 쾌락주의 철학자들(예를 들면 에피쿠로스·플루타르코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금육식을 권장했다. 이런 사상은 예배시에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을 비난했고, 간혹 영혼의 윤회 및 보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우주조화설에 대한 탐구와도 결합되었다. 인도에서는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이 인간은 어떤 감각있는 생명체에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금욕적 바탕에서 식량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생각은 곧 브라만 사회에서도 수용되었고, 특히 소에 적용되었다. 지중해 지역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이 사상은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을 비난하면서 때로 우주조화론과 결합되었다.
후에 채식주의는 인도와 지중해 지역에서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점차 쇠퇴했으나, 불살생 사상(ahiṃsā)이 금육식에 대한 자연스런 결과를 수반하며, AD 1000년까지 많은 상류계급(특히 비슈누파교도)과 일부 하류계급에게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불교가 시작된 인도와는 달리, 중국·한국·일본처럼 불교가 전파된 북동부지역에서는 동물을 살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덜 엄격했고, 고기가 공급되면 먹기도 했다. 몇몇 국가에서는 생선이 금육식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었다.
인더스 강 서쪽에서 세력을 떨친 일신교 전통은 채식주의에 대해 덜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성서에는 낙원의 최초 인간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육식은 노아의 대홍수 후에 허용되었는데, 그때도 동물의 피는 생명으로 간주되어 먹지 않았다. 유대 금욕주의자들과 몇몇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육식을 안락·탐욕·잔인·사치로 여겨 인정하지 않았다. 여러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규칙은 육식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를 어긴 일반 신자는 고백성사를 해야만 했다. 많은 이슬람교도가 채식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나 후에 이슬람 영적 생활의 주요안내자가 된 이슬람 수피교 신비론자는 영적 구도자들에게 금육식을 권장했다. 16세기에 인도를 다스렸던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는 수피교 관습에 따라 금육을 권장했다.
근대의 채식주의
근대에 들어 서유럽 및 세계의 생활상이 변하면서 채식주의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8세기 유럽에 퍼진 인도주의의 일부로서, 도덕적 진보의 확신과 더불어 동물 수난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피타고라스파의 육식반대가 제기되었다. 특정 개신교 집단은 성서에 대한 완전론적 봉독의 방편으로 금육을 했다.
다양한 철학관을 지닌 사람들이 채식주의를 옹호하여, 예를 들면 볼테르는 금육식을 찬양했고, 셸리와 소로가 이를 실행했다. 19세기 초반의 채식주의자들은 대개 고기는 물론 술의 섭취도 비난했고, 그들이 윤리적 민감성에 호소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풍부하고 양이 많은 육식과 대비되는 소식의 영양학적 장점에 대해 많은 호소를 했다. 어떤 사람은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점만을 지지했다. 보통 채식주의는 인간과 생명의 우주적인 조화로움에 대한 기타의 노력들과 결합되기도 했다.
19세기에 채식주의 운동은 비채식주의자 사이에서도 성과를 낳기 시작했다. 20세기초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것이 비채식주의자의 식사를 다양화하고 계몽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땅콩 버터와 콘플레이크 같은 음식이 미국의 채식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채식이 단순히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많은 섭생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독일 같은 지역에서는 금육식이 채식주의의 1가지 요소인 단순성과 건강을 지향하는 생활습관의 광범위한 개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채식주의자들에 의해 채식주의라는 용어는 '채식'(vegetable food)이 아닌 '활동적인, 생기있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vegetus에서 유래되었다.
전반적인 채식주의 운동은 근대의 레프 톨스토이 및 조지 버나드 쇼 같은 윤리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과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와 신지론자 같은 특정 종파에 의해 진척되었다. 이들 채식주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특수기관도 설립되었다. 영국과 미국(필라델피아)의 바이블 크리스천파는 전국채식주의자협회들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러한 협회들에서는 잡지를 발간했다.
최초의 채식주의자협회는 1847년 영국에서 발족되었다. 채식주의자협회의 세계연합조직은 1889년 임시적으로 설립되었고 1908년 국제채식주의자협회로 영구조직이 되었다. 후에 인도의 전통과 불교 신앙을 지닌 채식주의자들이 서양인으로 구성된 이 협회에 가입했다. 특정 유럽 국가에서 채식주의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식당·학교·휴양소가 생겼으며, 인도의 철도회사에서는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를 위한 이중 식당설비를 개발했다. 서양의 특수산업은 육식에 길들여진 사람이 채식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형태와 맛이 육류와 비슷한 고단백 채소음식을 가공하고 있으며, 건강식품 상점에서는 채식주의자 취향에 맞는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같은 목적으로 채식주의자협회에서는 단백질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콩류·견과류·치즈·달걀 등을 이용하는 요리책을 펴내고 있다. 국제채식주의자협회의 과학위원회는 과학잡지에서 논문들을 발췌하여, 채식주의자의 윤리적 기준에 더욱 부합할 수 있는 음식과 약품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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