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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후기 의주(義州)의 대안인 중강(中江:압록강의 蘭子島)에서 열렸던 중국과의 공무역.
회령개시·경원개시 등과 아울러 북관개시(北關開市)의 하나이며, 개시시기(開市時期)·교역기간·매매총수·교역품목 등이 정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당시 조선사회는 1592년(선조 25)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크게 피폐되어 기근이 심각했다. 이에 정부는 영의정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랴오둥[遼東]의 미곡을 구입해서 기민을 구제하고,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명에 개시를 요청했다(→ 〈중강개시〉). 명이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중강개시는 1593년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은 은을 주요한 지불수단으로 하여 구리·수철(水鐵)·면포 등을 가지고 가서 미곡과 군마 등을 구입했다. 시일이 흐르면서 개시에서 서로 물건을 약탈하려는 현상이 벌어지는 등 많은 폐단이 야기되자, 1601년에 혁파되었다. 이듬해 명과 조선정부가 중강개시의 수세(收稅)를 통하여 국가경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에서 다시 열렸다. 그러나 무역상의 불리함과 잠상(潛商)의 인삼교역 등으로 폐단이 발생하여, 1609년(광해군 1) 다시 폐지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서 승리한 후금은 명과의 전쟁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세폐(歲幣)와 중강개시의 재개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이듬해에 후금과 개시했는데, 후금측이 조선상인을 위협하여 물화를 싼 값으로 빼앗아 가고는 했다. 그러자 조선상인들은 개시에 참여하지 않게 되어 중강개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는데, 병자호란 후 청은 조공무역만으로는 물자보충이 힘들다며 북관개시의 재개를 요구함에 따라 1646년(인조 24) 중강개시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사상(私商)의 활동이 활발해져 대청교역(對淸交易)은 자유무역처럼 되어 중강후시(中江後市)·책문후시(柵門後市) 등이 성행하면서 사실상 중강개시는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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