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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3세기부터 네덜란드 내륙 깊숙이 만입한 북해의 한 만이었다가 20세기에 지금의 서(西)프리지아 제도에 의해 북해로부터 분리된 5,000㎢ 면적의 수역.
(영). Southern Sea.
서프리지아의 낮은 모래톱(현재는 섬)들에는 400년경부터 프리지아인들이 살았다. 그들은 해수면의 상승에 직면하여 최초의 해안 보루로 둑과 테르펜(또는 웨르덴)이라는 토루(土壘)를 쌓고 만조 때 그 위로 피산했다. 이 테르펜들은 인류의 위대한 토목사업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나중에 조이데르 해가 된 지역은 1세기에는 곳곳에 담수호들이 있는 저지였으며, 호수들 가운데 중앙에 있는 최대의 호수를 로마인들은 플레보라쿠스로 불렀다.
이 호수들은 바다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라인 강의 지류를 통해 물이 흘러나갔다. 그러나 후에 해수면이 융기하는 동안(250~600) 강과 중앙의 호수가 확장되었다. 이어 해수면이 낮아진 시기가 있었으나, 13세기(특히 1219, 1282)에 다시 범람이 일어나 넓은 지역이 침수하여 마침내 조이데르 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1000년경에는 테르펜 지역이 완전히 둑으로 에워싸였다. 둑 내의 수면을 조절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이 고인 넓은 저지대를 매립하는 일이 실행되었다. 1667년까지는 간척지의 조성사업이 크게 진척되어 조이데르 해를 둑으로 막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그러나 실현가능한 방법이 나타나지 않다가 1916년의 홍수를 계기로 코르넬리스 렐리가 입안한 계획이 서둘러 채택되었다.
1927~32년에 30㎞의 댐(아프슬로이트데이크 또는 '둘러싸는' 댐)이 조이데르 해를 가로질러 건설되었다. 댐에 의해 조이데르 해는 바깥쪽의 와덴 해(북해와 연결됨)와 안쪽의 에이셀 호로 분리되었다. 1920년대에는 에이셀 호였던 부분 중 거의 절반이 1980년대 초반 정교하게 건설된 양수장·둑·인공수로·수문체계를 통해 매립되어 농경지가 되었다. 크게 줄어든 에이셀 호는 점차 담수로 변했으며, 간척지 조성계획지 5곳 가운데 4곳의 매립이 완료되었다.→ 에이셀 호 간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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