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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240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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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7경 |
국적 | 진(秦), 중국 |
요약
중국 서체 가운데 하나인 예서(隸書)의 발전을 도모한 인물.
(병). Cheng Miao. (웨). Ch'eng Miao.
자는 원잠(元岑). 진(秦)나라 샤두[下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 시(西安市) 남쪽] 사람이다. 처음에는 현의 옥리(獄吏)였는데 시황제(始皇帝)의 노여움을 사서 윈양[雲陽]의 옥중에 갇혔다. 옥중에서 10년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대전·소전(小篆)의 각이 지고 둥근 필획을 개조하여 3,000자(字)의 예서를 만들었는데, 이를 상주하자 시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어사(御史)로 등용했다고 한다.
그당시에는 국가가 통일되고 정권이 집중되어 공문(公文)이 많아, 소전으로 쓰기에는 불편했다. 서리(胥吏)들은 정막이 고안한 서체가 쓰기에 아주 간편하여 예인(隸人:胥吏를 말함)의 번거로움을 도와주는 글자라고 하여 예서라고 불렀다. 정막은 소전의 개혁과 예서의 창제에 모두 이바지했지만, 예서에 대한 공헌이 특히 컸으므로 이후 오랫동안 예서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1980년 쓰촨 성[四川省] 칭촨 현[靑川縣] 하오자핑[郝家坪]에서 글자가 새겨진 전국시대 나무상자 2개가 출토되어, 이것으로 진이 전국을 통일하기 약 80년 전에 이미 예서가 출현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1975년 후베이 성[湖北省] 윈멍[雲夢] 쉐이디후[睡地虎] 진묘(秦墓)의 문미(門楣)에 씌어진 9자와 1,100여 개의 진대 죽간이 출토되어,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에는 이미 예서체의 통일이 꽤 이루어졌고 쓰는 것도 숙련되었음을 더욱 확실시해주었다. 따라서 정막이 예서를 창시했다는 학설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민간에 전해오던 예서체를 수집·정리한 것은 여전히 한자 발전사에 있어서 커다란 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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