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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원(元)나라가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했던 관청.
정동행성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했다. 1274년(충렬왕 즉위) 제1차 일본 원정을 시도했다가 불의의 태풍을 만나 실패한 원의 세조(世祖)는 예정된 제2차 일본 원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280년에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했다.
그러나 2차 원정 역시 태풍과 작전의 차질 등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정동행성은 1282년 1월에 폐지되었는데, 그후 원정이 또다시 추진됨에 따라 1283, 1285년에 복치되었다가 폐지되었다.
이후 정동행성은 원나라 중서성의 권한이 상서성으로 이관되면서 정동행상서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되는 등 1, 2차례 명칭의 변동은 있었지만 고려와 원나라 간의 공적 연락을 담당하는 등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여말까지 존속했다.
정동행성에는 일반행정을 담당한 좌우사와 사법사무를 담당한 이문소, 군무를 담당한 도진무사 및 원나라 과거의 향시 사무를 집행했던 유학제거사 등 중국 본토에 설치했던 11개 행성에 준하는 부속기관들이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이문소에서는 원의 조정에서 영향력 있는 자나 부원 세력의 전권으로 사무가 처결되는 경우가 많아 적지 않은 폐해를 일으킴으로써 1356년(공민왕 5)의 반원개혁 때 1차적인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정동행성의 직제는 표면적으로는 여타 행성과 마찬가지로 장관인 좌승상을 비롯하여 평장정사, 좌승과 우승, 참지정사에 이르는 고위 관직과 낭중·원외랑·도사 등의 하위 실무관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좌승상은 고려왕이 당연히 겸임하는 관직이었고, 평정정사로부터 참지정사까지는 대체로 원나라 사람으로 임명되었지만 충렬왕이나 충숙왕 말기와 같이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가 파행적으로 전개되거나 고려왕이 요청하는 특별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비워두고 대개 임명하지 않았다. 또한 낭중 이하의 하위관직은 형식적으로는 원이 임명했으나 주로 고려 왕의 추천으로 고려인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정동행성의 실제적인 기능에 대해서 고려 내정에 대한 감독기관 내지 통제기관이었다는 견해와, 명의상·의례상의 기관이었다는 서로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1299년 원이 고려를 간섭하기 위해 파견한 평장정사 활리길사(闊里吉思)와 우승 야율희일(耶律希逸) 등이 고려의 노비제도를 원의 제도처럼 개정하려 했을 때 고려의 중신들이 맹렬히 반대하여 그를 철회시키고 결국 이들을 파면하게 한 것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
이외에 원이 일시적으로 다른 행성 장관의 직위를 평장정사로 격하시켰을 때에도 정동행성만은 그대로 두는 등 우대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정동행성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부원세력은 충렬왕말부터 충혜왕말까지 수차례에 걸쳐 고려를 원의 내지로 완전히 복속시키려는 입성론을 제기하여 국가적 독립을 크게 위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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