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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재지사족은 넓은 의미에서 품관층을 포함하여 향촌사회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배계급을 가리킨다. 사회적으로는 지방에서 혈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중앙 벼슬에 진출하거나 향리가 되기도 하고, 토지 소유를 통해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을 형성해 정치세력으로 나섰고, 또한 중앙정계의 후원을 받았다. 유향소, 향약 등의 지방 조직을 형성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소유를 통해 농업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세기 이후는 유향소가 지방관청의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면서 재지사족의 영향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경제력의 차이로 계층이 분화되기도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는 흔히 양반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 사회가 변동하면서 지배층의 분화가 진행되었는데 지방세력 가운데 거경종사(居京從事)하는 자가 생기고 재지에 그 세력 기반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다. 처음부터 이들 재지세력이 일률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재지에 세력근거를 둔 지배층은 사족으로 성장하는 부류와 향리로 굳어지는 부류로 나누어졌다. 품관층이 형성되면서 때로는 재지사족을 품관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품관층은 조선초의 중심세력이기는 하지만 재지사족 그 자체는 아니었다.
재지사족은 넓은 의미에서 품관층을 포함하여 향촌사회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배계급을 가리킨다. 특히 국가권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지식계층까지 포함했다. 또한 재지사족이라는 말 속에는 다분히 혈연을 기준으로 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사류(士類)가 유자(儒者)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사족은 혈연적인 의미가 강한 것으로 향촌사회를 배경으로 강한 혈연적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직함은 있으나 직사가 없는 관원인 한량(閑良)이나, 동정직(同正職)·검교직(檢校職) 등은 직사 없이 향촌에 거주하면서 독서계급으로 하나의 사회세력을 형성했다. 실직은 낮으나 높은 산계(散階)를 가지고 향촌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 행세한 첨설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여러 부류의 신흥계층들은 이른바 품관층으로서 넓은 의미의 사족층을 형성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은 하층민을 압박하는 '향원'(鄕愿)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던 중소지주들이었다.
이들 중소지주들은 조선초 농업생산력의 정도를 높인 주체이기도 했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있어서 실제의 경작자인 일반농민의 기여는 결코 경시할 수 없지만, 그들이 달성할 수 있는 성과는 경험에서 얻어지는 개선에 그치기 쉬웠다. 지배층에게도 농업기술의 발전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농업기술의 획기적 발전으로 재지지주층의 기반 안정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비법과 같이 신흥사족 계열이 추구한 농업기술 개발의 목표는 중국 강남농법의 실현에 있었다. 강남농법이 선진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도입하여 보다 합리적인 영농사업을 행해 많은 소출을 올려 농촌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지주경영이 고려와 다른 점은 농지의 확대방식에도 있었다. 수조권 분급제도가 발달하고 있었던 시기에 봉건지배층의 토지집적을 통한 부의 축적은 토지 소유권을 늘리는 것이기도 했지만, 흔히 수조권 취득을 확대하는 것으로서 행해지고 있었다.
전자의 방법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나 후자는 그렇지 않아 특히 권력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수조권 분급제도가 변동·폐기되는 가운데 이같은 토지집적의 방법에도 변화가 일어나 후자의 방법이 소멸하고 전자의 방법만 남게 되었다. 수조지의 수입에만 의존하던 가난한 양반들도 이제는 토지의 소유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봉건지배층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소유권에 입각한 사적 소유지의 확장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 방법은 농민의 소유지나 관유지를 매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때로는 고리대를 통해서 차압하는 경우와 개간하여 농지를 확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농지들은 지주전호제로 경영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지배층은 향촌에서 대토지를 소유하는 지주층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향권을 잡는 지배세력이 되었다.
재지사족의 지주로서의 성장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이 중앙의 정책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재지사족 계열의 사림파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주자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중소지주층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는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확립을 추구했다. 〈주례〉보다는 〈소학〉·〈가례〉·〈춘추〉 등을 중요시하고 향약·사창·유향소·서원 등 향촌사대부의 자율적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촌락조직의 시행을 주요정강으로 내세웠다.
또한 그러한 조직체의 자치적 운영을 통해서 지주·전호 관계를 안정시키고, 그 토대 위에서 '사-민' 지배관계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즉 사족 주도의 사회건설이었다. 재지사족은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족계·족보를 만들거나 족회를 열기도 하고, 족내의 상호 결속을 강화하여 향촌사회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했다.
사족다거지역에서는 조상봉사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족계를 만들어 혈연적 유대를 강화했다. 또한 향약 시행의 주도세력이었으며 때로는 향규를 만들어 그의 세력을 확고히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향촌사회를 재건하고자 향촌민을 향촌사회 재건의 협력자로 인정하여 그들에 대한 일정한 양보 위에 동약을 시행하기도 했으나, 그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종전의 신분제적 질서와 같은 계급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들이 관직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관직에 나아가 사회적 위세를 유지했다. 17세기 이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권이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품관층은 유향소가 지방군현의 하부기구가 되자 심한 타격을 받았다.
물론 향청에 관여한 자와 유자계층에 속하는 재지사족과 엄밀하게 구분되는 부분도 있으나, 수령권을 강화하면서 유향소를 하부기구로 만들고 품관층을 관속으로 하락시켜 부세수납 따위를 맡게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일부의 재지사족은 서당·서원을 설립하여 자신들의 가문을 드러내려 했고 이들은 많은 수의 노비를 보유했으며 각처에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재지사족의 경제적 처지가 같지는 않았다. 친척의 소유토지를 빌려 경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족도 있었다. 이것이 후기사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재지사족의 분화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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