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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는 1109년 7월에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국자감에 7개의 전문교육강좌를 설치하여 7재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사학·향교·서원에 딸린 기숙사를 재라 했다.
고려 때는 유학강좌로 여택재·대빙재·경덕재·구인재·복응재·양정재를 두어 각각 <주역>·<상서>·<모시>·<주례>·<대례>·<춘추>를 강의하고, 강예재를 두어 무학을 강의했다. 조선 때는 대개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오른편과 왼편에 동재와 서재를 두었는데, 성균관의 경우 상재·하재를 나누어 상재는 생원·진사들이 쓰고, 하재는 각 지방에서 뽑혀온 유학들이 썼다. 1429년 당시 학생의 정원은 200명이었다. 재에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을 거재생·거재유생·재유라 했다.
고려는 1109년(예종 4) 7월에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국자감에 7개의 전문교육강좌를 설치하여 7재(七齋)라 했다.
유학강좌로 여택재(麗澤齋)·대빙재(待聘齋)·경덕재(經德齋)·구인재(求仁齋)·복응재(服膺齋)·양정재(養正齋)를 두어 각각 〈주역 周易〉·〈상서 尙書〉·〈모시 毛詩〉·〈주례 周禮〉·〈대례戴禮〉·〈춘추 春秋〉를 강의하고, 강예재(講藝齋)를 두어 무학(武學)을 강의했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사학·향교·서원(書院)에 딸린 기숙사를 재라 했다.
대개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오른편과 왼편에 동재와 서재를 두었는데, 성균관의 경우 상재(上齋)·하재(下齋)를 나누어 상재는 생원·진사들이 쓰고, 하재는 각 지방에서 뽑혀온 유학들이 썼다. 1429년(세종 11) 당시 학생의 정원은 200명이었다. 재에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을 거재생(居齋生)·거재유생(居齋儒生)·재유(齋儒)라 했다.
이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사학에서 진학한 경우를 승보기재(陞補寄齋), 공신 자손으로서 특별 입학한 경우를 문음기재(門蔭寄齋), 나라에서 주는 급식을 받지 못하고 식량을 가지고 와서 기숙하는 경우를 사량기재(私粮寄齋)라 했다. 향교와 서원은 정원 내의 학생인 내사생(內舍生)과 청강생인 외사생(外舍生)을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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