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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효조는 프로야구 통산 타율 3할3푼1리, 54홈런, 437타점을 기록하면서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중학교 때 단신이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비진의 빈틈으로 타구를 보내는 기술 연마를 시작하여, 방향에 관계없이 여기저기 마음먹은 대로 공을 때려내는 일명 '부챗살 타법'을 체득했다.
1973~74년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서 타격상과 최다안타상을 수상했다. 1976년 최연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혔고,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 참가해 한국야구의 국제대회 최초 우승에 기여했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첫해에 타율 3할6푼9리, 18홈런, 117안타 등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199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롯데와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011년 1월부터 삼성 2군 감독으로 활동하던 중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구 삼덕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으나 키가 작아서 야구부 입단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중학교 입학 당시 키가 150㎝ 정도에 불과하자 살아남기 위해 수비진의 빈틈으로 타구를 보내는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당시 방향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마음먹은 대로 공을 때려내는 일명 '부챗살 타법(광각 타법)'을 체득했다.
1973~74년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서 타격상과 최다안타상을 수상하는 등 대구상업고등학교를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며 '대구상고 전성시대'를 열었다. 2~3학년 때 열린 8개 전국대회에서 5차례나 타격왕이 될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한양대학교 2학년이던 1976년 백호기대회에서 실업 팀 선수들을 제치고 타격왕이 된 후 그 해 최연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혔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 참가해 한국야구가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대학 졸업 후 포항제철과 육군중앙경리단(현 국군체육부대)에서 활약했던 그는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첫해 92경기에서 타율 3할6푼9리(1위), 18홈런(공동 3위), 117안타(공동 1위), 62타점(공동 3위), 22도루(4위), 장타율 6할1푼8리(1위), 출루율 4할7푼5리(1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1985~87년 연속해서 타격왕에 오르며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 등으로 불렸으나 연봉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1989년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1992년 타율이 2할6푼5리로 떨어지자 은퇴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6년 동안 타격코치를 지냈다. 1999년 미국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으며 지도자 수업을 했고, 2000년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로 부임했지만 재계약에 실패했다. 2004년 〈국제신문〉에 '장효조의 만루홈런'이란 제목으로 관전평을 쓰면서 다시 야구와 인연을 맺었고, 2005년 스카우트로서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왔다.
2009년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가 2011년 1월부터 2군 감독으로 활동하던 중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로야구 통산 타율 3할3푼1리, 54홈런, 437타점을 기록하면서 '한국 최고의 교타자'로 명성을 날렸다. 프로야구 생활을 했던 10년간 타율이 3할 미만으로 떨어진 적은 두 번(1990·1992)밖에 없었다. 2011년 한국 프로야구 30년 올스타 레전드 외야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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