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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산업

다른 표기 언어 automobile industy , 自動車産業

요약 자동차에 관련된 산업.

일반적으로 국가의 산업발전을 선도하는 기간산업·전략산업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자동차산업은 철강·기계·전기·전자·화학·섬유 등 광범한 관련 공업제품(약 5,000여 종 2만여 개 부품)을 결합하여 최종 상품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종합기계공업으로서 기술집약적일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산업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자동차산업의 판도를 좌우해온 것은 국민경제의 규모가 크고 자본과 기술에서 앞서가는 소수의 선진국들, 특히 미국·서유럽·일본 등지의 자동차업체들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자체의 힘으로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고 완제품을 그대로 수입하거나 선진국 자동차업체를 대행하여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에 자동차가 최초로 선보인 것은 조선 말기인 1903년(광무 7)으로, 고종 황제를 위해 미국에서 다이뮬러 승용차를 들여온 것이 효시이다.

일제강점기부터는 자동차 수리정비업과 부품업 등에서 미약하나마 자동차산업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일본 대자본에 의한 식민지이식형 공업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그 발전이 제약되어 있었다. 8·15해방 이후 미군정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군수차량의 보수용 부품 제조가 다소 활기를 띠게 되고, 195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는 비록 열악한 수공업적 방식으로나마 최초의 국산 자동차 조립(1955, 시발자동차)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동차산업이 근대적 생산방식을 갖춘 하나의 산업 범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0년대초이며, 한국 자동차산업의 본격적인 발전사는 바로 이 시점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수입부품의 단순조립 단계와 1970년대 국산 고유 모델의 자동차개발 단계를 거쳐 1980년대 중반부터 기술수준의 제고와 대량생산체제의 확립을 통한 자동차 및 부품의 본격적인 수출산업화 단계를 맞이했다. 1990년대는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기로 자동차업체의 대형화와 외국자동차 회사와의 합작이라는 급격한 체질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수립된 해인 1962년 5월 자동차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자동차공업보호법'이 시한법(~1967. 12)으로 제정되어 완성차의 수입이 규제됨으로써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초보적이나마 수입대체산업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 법을 근거로 하여 연생산능력 6,000대의 규모를 갖춘 새나라자동차가 설립되어 일본 닛산자동차[日産自動車]와의 기술제휴로 승용차 생산에 착수했으나, 부품 수입이 곤란해져 이듬해인 1963년에는 생산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1965년에 이 시설을 인수한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다[豊山]와 손을 잡고 각종 자동차를 생산했다. 이후 1968년에는 1967년에 설립된 현대자동차가 미국의 포드(Ford)사와, 1965년에 세워진 아세아자동차가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사 및 프랑스의 FFSA사와 기술제휴로 자동차 생산에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조립용 부품을 수입하여 자동차를 조립·생산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며, 반제품의 단순조립에서 시작하여 1960년대말에는 완전분해부품의 조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동차업계는 열악한 국내자본과 기술수준으로 인해 해외로부터의 차관도입과 외국 자동차업체의 부품공급 및 기술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영세한 조립업체들의 난립으로 말미암아 '규모의 경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에 머물러 있었다.

1970년대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수립한 장기자동차공업진흥계획(1974. 5)에 힘입어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이전의 초보적인 수입대체를 탈피하는 전기를 맞는다.

1970년대 한국 자동차산업의 향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장기자동차공업진흥계획은 ① 한국형 소형 승용차의 양산체제(연생산 5만 대)를 확립하고 1975년까지 자동차의 완전 국산화(국산화율 95%)를 달성하며, ② 기존의 완성차업체들을 통폐합하여 1개 업체당 1개 주력 차종의 전문 양산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엔진 및 차체 공장의 건설을 의무화하고, ③ 부품공장의 전문 양산체제 구축과, ④ 이를 촉진하기 위한 금융상·세제상의 지원 등을 명시했다.

이 계획에서 정부의 자동차산업 육성정책의 방향은 소형 승용차의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고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당시 자동차업계의 승용차 생산부분은 현대자동차, 아세아자동차, 그리고 1971년 일본 동양공업과의 기술제휴로 4륜차 생산에 참여한 기아산업, 1972년 신진자동차가 미국의 GM사와 합작(50:50)하여 회사명을 변경한 지엠코리아(GMK)가 4원화된 경쟁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위 계획과 관련하여 이들이 정부에 제출한 소형 승용차의 생산 및 투자계획 중 현대·기아·지엠코리아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위 계획에 따라 이들 3개 업체가 1970년대 중반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소형차는 현대가 일본의 미쓰비시[三菱]와의 기술제휴로 만든 고유 모델 '포니', 기아가 일본 마즈다의 모델을 개량하여 만든 '브리사', 지엠코리아가 지엠의 모델을 개량하여 만든 '카미나' 등이다. 내수의 활황과 특히 고유 모델 소형차 '포니'의 성공에 힘입어 1970년대 초반에 약 1만 대에 불과했던 국내 승용차의 생산이 1979년에는 10만 대를 넘어섰고 전체 자동차의 생산도 20만 대를 돌파했으며, 국산화 역시 명목상으로는 계획에서 제시한 수치의 95%에 거의 근접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국내 판매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기는 하지만 자동차의 수출이 시도되는 등 성장산업으로서의 밝은 전망이 보이자, 자동차산업은 1979년에 정부가 선정하는 10대 전략산업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 잠시 활성화되었던 자동차산업은 제2차 석유위기를 계기로 한국 경제가 불황기로 접어들면서 침체국면을 맞게 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 1979년 말에 휘발유 가격이 인상되고 정부가 긴축정책을 실시하며 소비를 억제함에 따라 자동차의 국내수요는 급속히 위축되었고, 완성차업체들의 판매부진과 재고누적으로 가동률이 저하되면서 그 경영난의 여파가 부품업체들의 휴·폐업 사태로까지 번져갔다.

짧은 호황기인 1977~79년에 자동차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생산시설을 확장하고 이에 더하여 막대한 설비투자계획까지 세워놓았는데, 국내수요의 격감으로 그간에 내재해 있었던 과잉중복투자의 문제점이 마침내 표면에 드러났다. 이에 정부는 중화학부문에 대한 산업합리화조치의 일부로서 1980년 8월(8·20조치)과 1981년 2월(2·28조치)의 2차례에 걸쳐 자동차산업의 투자조정을 단행하여 '차종별 전문화'를 위한 자동차업체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실상 투자조정의 본래 목적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는데, 승용차 생산의 일원화 방침은 현대와 지엠이 통합조건을 놓고 마찰을 빚어 결국 제2차 투자조정에서는 승용차 생산을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이전의 지엠코리아)로 이원화하는 안으로 후퇴하고, 상용차와 특정차의 전문생산을 위해 기아산업과 동아자동차를 합병하려던 계획 역시 해당업체들의 반발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한시적으로나마 신규업체의 참여를 금지하고 차종제한의 효력을 유지함으로써, 기존 업체들이 적자 경영에서 회복하여 새로운 돌파구인 '수출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설비투자를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본격적인 수출산업화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은 세계 자동차산업의 동향에서 보이는 일정한 변화추세와 맥락을 같이한다. 먼저 자동차산업의 하이테크(high-tech)화와 함께 국제경쟁의 판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1970년대에 2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고도의 생산기술로 양산체제를 갖추고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도록 설계·제조된 일본의 소형차가 미국의 대형차와 유럽 차를 제치고 세계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이처럼 선진국간의 경쟁과 무역마찰이 한층 심화됨에 따라 선진국 자동차업체들은 노무비를 절약하여 경쟁력을 보완할 의도에서, 또는 무역마찰을 피하기 위한 우회수출의 목적으로 어느 정도 숙련된 노동력과 산업기반을 갖춘 신흥공업국들에서의 다국적 생산과 이에 의한 해외조달전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국내 자동차업체로서도 첨단기술을 습득하고 선진국 시장의 장벽을 타개하기 위해 선진국 자동차업체들과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필요로 했는데, 이런 양측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 합작사업으로 추진된 것이 1980년대의 수출전략형 소형 승용차의 개발이다.

이미 새한자동차(지금의 대우자동차)의 50%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GM사는 투자조정에서 현대와의 통합이 결렬된 직후 총 10억 달러를 투자해 연간 30만 대의 월드카 생산계획을 발표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현대자동차는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의 자본참여(14.7%) 아래 전륜구동형 엔진 공장을 비롯한 연산 30만 대의 공장건설계획을 확정지었다.

한편 기아자동차는 일본 마즈다와 미국 포드사의 자본참여(마즈다 및 이토쥬 10%, 포드 10%)를 허용하고 차종 제한조치가 풀린 1987년부터 소형 승용차의 생산에 착수했다.

현대·대우·기아 등 3개 자동차업체는 1985~87년의 시기부터 전륜구동형 소형 승용차 모델인 '엑셀', '르망', '프라이드'를 시판하는데, 이 소형차들은 국내 최초로 수출에 역점을 두고 개발된 선도적인 전략 차종들이다.

중동지역을 비롯한 제3세계 지역으로 소량을 수출하던 1970년대와는 달리 1980년대에는 수출시장의 핵심이 북아메리카 시장으로 옮겨지는 한편 수출물량도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1987년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자동차 생산의 절반을 넘는 55만 대(승용차 54만 대)를 수출했고 수출량의 약 85%가 북아메리카 시장에 집중되어 있다.

북아메리카 시장의 수출에서 대우자동차나 기아자동차가 각각 합작 파트너인 지엠과 포드의 판매망과 상호·상표를 이용하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에 의존한 것과 달리,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는 미국에 별도의 판매망을 구축했으며 1985년에는 캐나다에 현지 조립공장을 건설하여 현지생산을 시도하는 등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시장개척에 있어서도 독자성을 보였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국내외적인 조건에 변화가 나타남에 따라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기술개발의 상대적 지체현상이 쉽게 극복되지 않아 기술경쟁력이 떨어졌으며, 1987년 이후 노사관계의 불안과 임금상승으로 가격경쟁력마저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현지생산전략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자동차의 북아메리카 시장 진입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또한 선진국의 경제개방 압력을 수용하여 자동차의 수입이 전면 자유화되었고(1988. 7), 완성차 및 부품생산에 대한 외국인 투자나 신규참여의 제한도 거의 철폐되었다.

이렇듯 국내외 자동차 시장이 좁아짐에 따라 자동차업체 간 경쟁은 전례 없이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4년 정부는 자동차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허가했다. 그러나 과잉투자 논란 속에 1995년에 출범한 삼성자동차는 1997년말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치자 엄청난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4년도 채 못되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는 모(母)그룹인 기아그룹과 대우그룹이 자금난에 처하면서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실기업을 정리한다는 원칙에 따라 자동차업계는 일대 재편기를 맞게 되었다. 1999년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고, 2000년 삼성자동차는 프랑스 르노자동차의 투자로 르노삼성이란 사호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대우자동차는 2002년 미국의 GM사에 인수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현대와 기아자동차를 주축으로 한 국내업체와 르노삼성과 GM을 주축으로 한 외국업체 간에 치열한 경쟁터가 되었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자본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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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산업은 그 발전과정에서 다른 신흥공업국들과 구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소유와 경영이 다국적 기업인 선진국 자동차업체들에 거의 종속되어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브라질·멕시코와 달리 한국은 국내의 민간 대자본이 다국적 기업과의 국제분업 관계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생산의 주도권을 행사해왔다. 게다가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규모의 경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를 확립하고 국내 시장을 넘어 선진국 시장으로의 역수출을 신속히 달성한 매우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대부분의 한국 자동차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전락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선해야 할 점도 많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자동차산업의 오늘을 가능하게 한 재벌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어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장논리와 관계 없는 선단식 운영이나 상호 빚보증 등 과거 재벌 체제의 구태의연한 경영 형태에서 벗어나 자동차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고 자동차와 관계 없는 분야는 과감히 청산하는 등 전문기업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유수의 선진국 자동차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 남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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