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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274년(충렬왕 즉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고자 했던 사건.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원은 일본지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원 세조(世祖)는 일본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기 위해 모두 6차에 걸쳐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이 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원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굴복시키기로 하고 대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1차 원정은 1274년 10월 원 세조의 명으로 이루어졌다. 원의 도원수 홀돈(忽敦), 보원수 홍다구(洪茶丘)가 2만 5,000명의 몽한군(蒙漢軍)을 지휘하고 고려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이 8,000명의 고려군과 6,700명의 초공(梢工), 수수(水手)를 지휘했다. 여원연합군은 900여 척의 전함을 동원해 쓰시마섬[對馬島]과 이키섬[壹岐島]을 정복하고, 이어서 일본 본토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다음달 귀환했다. 이로써 1차 원정은 1만 3,500여 명의 많은 희생자와 막대한 물적 피해를 입은 채 실패로 끝났다.
1차 원정이 실패한 이후 원 세조는 원정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본에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하는 한편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남송(南宋)을 정복한 직후인 1279년부터 일본원정을 준비했다(→ 쿠빌라이 칸). 그동안 원의 일본 초유나 원정에 대해 소극적이던 고려는 적극적으로 원정 계획에 참여했다. 특히 충렬왕은 일본원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홍다구 등의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고려는 병선 900척, 초공, 수수 1만 5,000명, 정군(正軍) 1만 명, 병량(兵糧) 11만 석, 그밖의 많은 병기들을 동원하는 등 1차 원정 때보다 훨씬 많은 인적·물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한편 원도 3만 명의 몽한군 이외에 멸망한 남송의 군대 10만 명을 더 동원해 1차 원정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다. 마침내 1281년(충렬왕 7) 5월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과 혼도·홍다구가 지휘하는 몽한군은 9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합포를 떠나 이키 섬으로 향했고, 송의 항장(降將) 범문호(范文虎)가 지휘하는 강남군(江南軍)도 3,500여 척의 배를 동원해 이키 섬으로 출발했다. 양군은 이키 섬에서 합류하기도 했으나 강남군이 예정보다 늦게 도착해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게다가 일본의 저항이 예상외로 강했고 또다시 태풍을 만나 원정군은 10만 명의 병력을 잃는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2차 원정도 실패했다. 2차에 걸친 원정이 실패한 이후에도 원 세조는 일본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후에도 일본원정의 준비와 중단의 과정이 몇 차례 되풀이되다가 세조가 죽은 1294년 비로소 완전히 포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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