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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 말기 공민왕 때 반원정책의 실시로 원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국경지역에 설치된 군사조직.
조선초까지 계승되었다. 익군은 처음에는 출정군으로 동원되는 주력부대에 대한 원군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민왕 때 원과의 관계 단절에 따라 국경지역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그동안 붕괴되었던 군사조직의 재건을 시도하여, 양계지역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에 우익부대로 익군을 조직했다. 또한 남도지역에도 빈번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익군을 조직했다. 이러한 익군 조직은 제도상 그 체제나 명칭은 원의 만호부 또는 익군체제를 본뜬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고려 전기의 주현군조직을 재건한 것이다.
익군은 모두 일반 농민층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군적에 올리고 군역을 담당하게 한 것으로, 고려 전기의 지방군과 같이 병농일치제에 의한 군역체제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익군은 대몽전쟁 이후 사실상 붕괴상태에 있던 지방군조직이 전기의 주현군체제에 따라 재편성되었다. 남도지역은 국가의 공부·차역이 나오는 곳인데 익군이 조직됨으로 인해 농민들이 실업·유망하여 농민에게 의존하던 국가재정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남도의 익군은 설치된 지 1년도 안 되어 폐지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에는 남도지역을 제외한 평안도와 함길도의 양도에만 익군조직이 유지되었다.
조선왕조는 중앙정부가 지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되는 세종대에 이르러 평안도와 함길도 양도를 군익도체제로 정비했다. 군익도는 익군을 주병종으로 삼아 다른 병종까지도 그 편제 속에 망라하는 군사단위로 도내의 군현이 모두 군익도에 소속되었다. 군익도는 행정과 군사가 일원화되어 양도의 모든 수령은 군익도의 군직을 겸임했고 따라서 연변의 수령처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임명되었다.
익군조직은 천호·백호·통주 등에 의해 관장되었고 그들이 통솔하는 병력 규모는 천호가 100호, 백호가 50호, 통주가 10호였다. 천호·백호·통주는 처음에는 세습직이었으나 후에는 임기가 정해졌다. 북방지역의 익군체제는 점차 중앙집권력이 확립되면서 세조대에는 지방군제가 진관체제로 정비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익군의 지휘관도 중앙에서 파견하는 체제로 바뀌어갔다. 이는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어 지방군제가 진관체제로 일원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결국 익군은 시위패와 통합되어 정병으로 합칭되면서 점차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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