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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09(중종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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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76(선조 9)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덕이 높고 청렴한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임꺽정이 세력을 떨치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진압에 노력했다.
1535년(중종 30)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며, 1550년 춘추관기주관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권력자 윤원형이 첩을 처로 삼고 서얼허통론을 주장하자 차자를 올려 논박했다. 1559년 임꺽정이 세력을 떨치자 황해도관찰사로 나가 진압에 노력했다. 대사헌이 된 이듬해인 1565년에 대사간 박순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 가게 했다. 이조판서 재직시 재주가 있고 품행이 뛰어난 자를 시재 여부에 구애받지 말고 모두 벼슬을 줄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또한 이조좌랑 정철이 벼슬 후보추천에서 그의 뜻을 어기고 번복하는 일이 많았으나 이를 직언으로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1571년(선조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선명(善鳴), 호는 약봉(藥峰). 할아버지는 현감 맹희(孟禧)이고, 아버지는 군수 창형(昌亨)이다. 1535년(중종 3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사인(舍人)·집의 등을 지냈다. 1546년(명종 1) 권신 이기(李芑)를 탄핵하다가 좌천되었다.
1550년 춘추관기주관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551년 직제학이 되고, 이듬해 동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다. 1553년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나라에 갈 때 한 역에 이르러 주인이 "이 집에 요물(妖物)이 있어 사신이 모두 유숙하지 못합니다"라고 했으나 억지로 유숙하고, 그날밤에 마침 곽란을 일으켜 수행원들이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청했으나 고집하고 듣지 않음으로써 그뒤 요물이 있다는 말이 없어졌다 한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권력자 윤원형(尹元衡)이 첩을 처로 삼고 서얼허통론을 주장하자 차자(箚子)를 올려 논박했다.
도승지·한성부우윤 등을 거쳐, 1559년 임꺽정이 세력을 떨치자 황해도관찰사로 나가 진압에 노력했다. 그후 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내고 1564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 박순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했다. 이어 공조판서·호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 재직시 재주가 있고 품행이 뛰어난 자를 시재(試才) 여부에 구애받지 말고 모두 벼슬을 줄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또한 이조좌랑 정철(鄭澈)이 벼슬 후보추천에서 그의 뜻을 어기고 번복하는 일이 많았으나 이를 직언으로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1571년(선조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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