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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

다른 표기 언어 李資謙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1126(인종 4)
국적 고려, 한국
종교 불교
본관 경원(慶源, 지금의 인천광역시)

요약 고려 예종 때 문벌귀족으로 예종의 외척이 되어 전횡을 일삼은 고려 중기의 문신.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연덕궁주가 되자 왕권의 안정을 위해 선택돼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반대파를 살해하거나 유배해 제거했다. 이러한 전횡이 계속되자 인종과 신진세력이 이해관계를 같이 해 난을 일으켰지만 척준경과 무리를 이끌고 가서 불을 질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후 인종을 독살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인종은 내의 최사전을 통해 척준경과의 사이를 떼어놓았고, 척준경에 의해 일파가 제거됐다. 1126년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었다.

출생과 배경

본관은 경원(慶源:仁州). 할아버지는 중서령(中書令) 자연(子淵)이며, 아버지는 경원백(慶源伯) 호(顥)이다. 어머니는 평장사(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의 딸이고, 처는 문하시중 최사추(崔思諏)의 딸이다. 경원이씨는 이허겸(李許謙)의 외손녀 3명이 현종의 비(妃)가 되면서 세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 때에 와서 외척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문벌귀족으로 성장했다. 이자겸은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음서(蔭敍)를 통해 벼슬에 나아가 말직인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

외척 세력으로 성장

이자겸이 빠른 속도로 출세하기 시작한 것은 예종 때부터였다. 예종은 1108년(예종 3) 급사중(給事中)이었던 이자겸의 둘째 딸을 비로 맞아들여 연덕궁주(延德宮主)라고 했다. 연덕궁주는 1109년에 원자(元子:뒤의 인종)를 낳았으며, 1114년 12월에는 왕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외척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한 예종에 의해 선택되어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자겸은 곧 이어 종2품, 정2품 관직을 거쳐,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徒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당시 종1품은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직위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의 국무총리 정도에 해당하는 지위에 오른 셈이었다. 예종은 이자겸을 비롯한 외척 세력이 힘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러 세력을 일정한 균형 위에서 조절하여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으면서 왕권을 강화·유지했다.

인종 즉위와 권력 장악

그러나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고, 1122년 4월 14세의 어린 인종이 이자겸의 보위를 받아 즉위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새 왕 즉위 후 권력을 장악한 이자겸은 반대파 제거에 나섰다. 그해 12월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보(俌)가 한안인(韓安仁) 등과 더불어 국법을 어기고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쓰고 일당 50여 명과 함께 살해·유배되었다. 1124년(인종 2) 2월에는 최홍재(崔弘宰)를 유배보냈다. 세력을 굳힌 이자겸은 숭덕부(崇德府)를 열어 휘하에 직속 신하를 따로 두었으며, 궁을 의친궁(懿親宮)이라고 했다. 나아가 자제와 친족을 요직에 앉히고, 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을 승려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인 수좌(首座)로 삼아 불교세력과 유대를 강화했으며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비로 들여보냈다.

전횡과 신진세력의 반발

이와 같은 여러 조치를 통해 세력기반을 굳힌 이자겸은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 그의 집에는 썩어나는 고기만도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사로이 숭덕부의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 표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면서 지군국사(知軍國事)를 자칭했으며 이 직함을 왕이 직접 내려주도록 강청하기도 했다. 지군국사는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신하로서는 가질 수 없는 직함이었다. 이러한 이자겸의 전횡은 예종이 시도했던 왕권강화책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학을 바탕으로 중앙에 진출한 지방 신진관료들의 성장이 개경 문벌세력에 의하여 저지됨으로써 지배층 내부의 충돌이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이자겸의 전횡을 꺼리게 된 인종과 신진세력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이자겸의 제거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자겸 제거 시도

1126년 2월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하여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섰다. 약속된 날 밤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했다.

이자겸의 난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궁성을 포위한 뒤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놀란 왕은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이자겸은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의 대신들이 반대할 것을 염려했고, 재종형제간인 이수(李壽)가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이자겸의 난). 그뒤 이자겸은 자신의 집인 중흥택(中興宅)의 서원(西院)에 왕을 연금하고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인종 독살 시도와 몰락

그는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왕위를 노려서 여러 번 왕을 독살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자신의 넷째 딸인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왕의 밀명을 받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떼어놓는 데 성공하여, 1126년 5월 척준경이 이자겸 일파를 제거했다. 이자겸은 그해 12월 유배지인 영광(靈光)에서 죽었다. 이후 척준경은 잠시 권력을 쥐고 국정을 흔들었지만, 1127년 3월에 우정언(右正言) 정지상(鄭知常)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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