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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8(중종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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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1(선조 34)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용인. 자는 중경(重卿).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한 뒤 경성판관·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했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사로서 야인 니탕개(尼蕩介)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86년 니탕개가 회령에 재침입하자 이를 물리친 공으로 이듬해 함경북병사가 되었다.
1588년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신립과 함께 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 부락을 소탕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변사로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충주로 탈주했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가 다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했으나, 다시 패하여 황해도·평안도로 피했다. 그뒤 5월 17~18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막하에서 임진강전투에 참여했다가 또 패했다. 7월 14일 왕세자 광해군의 분조(分朝)에서 시위하다가, 1593년 1월 6일 평안도병마절도사로 평양전투에 참가하여 평양을 탈환했다.
그뒤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지중추부사·비변사당상·좌지사가 되어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한성 치안유지에 힘썼다.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서 난을 진압했다. 함경북병사·지중추부사·행호군을 거쳐 함경남병마사가 되었다가 1601년에 부하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아 한성으로 호송되던 중 죽었다. 저서로 〈증보제승방략 增補制勝方略〉이 있다.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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