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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5. 11. 29, 일본 히코네[彦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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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0. 3. 24, 에도[江戶]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의 봉건영주·정치가.
개요
1867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가 붕괴하기 직전 바쿠후의 전통적인 정치권력을 다시 한 번 강화하고자 했으며,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이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이와 그의 가문
이이 가문은 히코네 한[藩]을 다스렸으며, 12세기 이래 일본을 통치해오던 바쿠후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이 가문이 막강한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초 도쿠가와 바쿠후의 성립에 기여했던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중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이 나오나카[井伊直中]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미 그의 아버지가 권력을 3남에게 물려준 후였다. 아버지가 죽자 상속자를 제외한 모든 아들은 가문의 관습에 따라 다른 영주의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거나 적은 급료를 받는 가신(家臣)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그는 입적할 만한 가문이 없어 유일하게 양자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대신 자기 가문이 설립한 학교에서 학문을 닦는 데 몸바쳐 무사로서 일본의 전통문화와 무예를 공부하는 한편 강인한 의지와 독립심을 길렀다(→ 바쿠후). 그가 31세 되던 해 형의 아들이 죽자,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양자로 입적되지 않았던 그는 가문의 상속자 후보가 되는 뜻밖의 행운을 안았다.
1850년 형이 죽자 35세의 나이로 히코네 한의 영주가 됨으로써 전국적인 정치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페리의 내항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소함대가 일본에 도착하면서 도쿠가와 바쿠후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페리 제독을 일본에 보내 전통적인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외부세계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막강한 힘에 압도된 바쿠후는 관례를 깨고 봉건귀족들의 조언을 구했다. 이이는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지지하는 세력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일본이 아직 외세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국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외국과 교류를 함으로써 차후 다시 쇄국정책을 취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봉건귀족들은 필요하다면 외국의 침략자들을 무력으로 격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미국함대를 물리칠 만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던 도쿠가와 바쿠후는 1854년 페리 협정(미일화친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미국 선박이 보급품 충당과 수선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항구 2곳을 개방했다. 페리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던 통상문제에 관한 의견조정 작업은 초대 일본 영사가 된 타운센드 해리스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쇄국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반발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통상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제는 자식이 없었던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의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국내정치의 위기상황과 복잡하게 뒤얽혔다.
당시 쇼군 계승자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후보자가 2명 있었는데, 한 사람은 이에사다의 사촌으로 아직 나이가 어렸으며 다른 한 사람은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아들로 장성한 나이에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나리아키는 이에사다의 유일한 방계 혈족으로 집권세력의 일원은 아니었으나 아들을 쇼군 계승자로 옹립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이에사다의 사촌은 로주[老中]들, 즉 바쿠후 정권에서 정책결정권을 쥐고 있던 소수의 후다이 다이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기존의 권력이 유지되기를 열망하고 있던 로주들은 어린 쇼군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정국은 권력투쟁 국면으로 발전해갔다.
이이 나오스케는 1858년 다이로[大老]에 취임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계승문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다이로는 통상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임명되는 바쿠후의 최고 관직이었다. 한편 그가 다이로에 취임하기 전 바쿠후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조인하는 데 덴노의 허가를 얻어내고자 했으나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세력들 때문에 허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협상대표들에게 덴노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조약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보다 포괄적인 조약을 요구할 것이라 내다본 그는 미국과의 조약체결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일본은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쇼군 계승
이이 나오스케는 쇼군 계승문제에 있어서 외교문제보다 훨씬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신진 세력을 참여시키라는 나리아키와 다른 인사들의 압력을 무시하고 이에사다의 사촌을 쇼군 계승자로 발탁함으로써 자신을 다이로에 임명한 후다이 다이묘 편을 들었다. 나리아키가 주도하는 호족대표들은 이같은 처사에 반발하며 이이 나오스케가 덴노의 허가없이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고 비난하는 한편 나리아키의 아들을 쇼군 계승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러한 불평과 요구사항들을 일축하고 반대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그는 나리아키를 가택연금하고 다른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켰으며 일부 관리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단기간으로 끝났다.
1860년 3월 24일 가신과 경호원을 데리고 쇼군의 성으로 향하던 중 매복하고 있던 나리아키의 추종세력들이 기습공격하여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베어버림으로써 그의 출세가도는 끝났다. 다이로로서의 그의 단호한 지도력은 잠시 바쿠후 체제를 안정시키고 도쿠가와 바쿠후의 지배를 존속시켰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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