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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

다른 표기 언어 李源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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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9. 6. 2, 경북 안동
사망 1953. 7. 30
국적 한국

요약 문학평론가.

호는 여천(黎川). 필명은 백목아(柏木兒).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 일본대학 전문부를 거쳐 1935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 기자, 대동출판사 주간 등을 지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에 참여했고, 1945년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가동맹의 서기장 및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47년 임화·김남천·이태준 등과 월북했다. 6·25전쟁 때는 〈해방일보〉 주필을 지냈으며, 1951년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남로당 계열의 숙청재판에서 12년 징역과 전재산 몰수형을 받고 복역하다 옥사했다.

1931년 1월 〈동아일보〉에 〈자살론〉을 발표하고 1932년을 전후해 〈신춘문예 문학개평〉, 〈A. 지드론〉으로 한국문단에 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 문학)측의 입장에서 여러 문학논쟁에 참여했다. 특히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때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해산 이후 프로 문학 비평의 정론성이 무너짐으로써 전형기(轉形期)를 맞은 비평계의 방향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또한 〈현단계의 문학과 우리의 '포즈'에 대한 성찰〉(조선일보, 1936. 7. 11~17)을 통해 포즈론을 제안했는데, 여기서 포즈론은 일종의 도덕론으로 문학의 매력은 행동(정치적 실천)보다 포즈에 있다고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 〈조선문학의 당면과제〉(중앙신문, 1945. 11. 6~13)·〈조선문학비평에 관한 보고〉(전국문학자대회보고연설, 1946. 2. 8~9)·〈민족문화발전의 개관〉(민고, 1946. 5)·〈민족문화건설과 유산계승에 관하여〉(문학, 1946. 7) 등을 발표했다. 이 글들의 주요 내용인 민족문학 건설의 본보기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신민주주의론'에 기댄 문화혁명론으로 문화 전반을 통한 민족적인 성격의 혁명을 지향하는 것이다. 민족문학은 극좌·극우를 반대하고 무산계급의 작가들을 지도자로 한 통일전선 속에서 무산계급문학의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비원리적·투항주의적 통일전선', '민족문화의 초계급성'을 뜻하는 부르주아 미학사상의 잔재라 하여 안막·윤규섭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는 임화 등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 종파주의자가 정치적으로 숙청당했을 뿐만 아니라 미학적·문학적으로도 매장되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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