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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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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이집트 |
요약
5세기에 활동한 신학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주교.
(영). John Talaia.
교황 심플리키우스(468~483 재위)와 펠릭스 3세(483~492 재위)에게 협력하여 이단적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의 개입에 맞서 자신의 주교직을 지키고 정통파의 우위를 유지하려고 투쟁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일시적 분열을 일으킨 인물이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이자 궁상(宮相)인 이오안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티모테오스에 의해 그 자신을 계승하여 정통파의 규율을 유지시킬 인물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 제논(474~491 재위)에게 추천되었다.
티모테오스가 죽자 이오안네스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주교로 선출되었으나(482. 4), 총대주교 아카키우스는 얼마 뒤 그를 유티케스를 추종하는 이단자로 고발했다. 이오안네스가 아카키우스의 고발을 부인하자 그는 위증죄로 기소되었다. 제논의 압력 때문에 이오안네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떠나야 했으며, 주교 자리는 아카키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페트루스 3세 몽구스가 차지했다.
482년말 아카키우스는 황제 제논의 허락을 받아 니케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의 결정사항을 통합하여 그리스도교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교리의 신학적 신조인 〈헤노티콘〉을 저술했다. 이오안네스가 교황 펠릭스 3세에게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청하자, 485년 교황은 아카키우스가 〈헤노티콘〉을 공포할 때 로마 교회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카키우스와 그의 일파를 파문하여 분열이 촉진되었다(→ 아카키우스 분열). 이 분열은 519년 황제 유스티누스 1세가 화해를 요청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독립적인 비잔틴 교회가 세워져 양측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으며, 마침내 1054년 결정적인 분열로 귀결되었다. 이오안네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복직되지는 않았지만 484년 이탈리아 놀라의 주교로 임명된 직후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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