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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규

다른 표기 언어 李萬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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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 강원 원성
사망 1978
국적 한국

요약 교육자.

소농인 한산이씨 명직과 밀양박씨 현숙 사이의 2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서울의 경성의학강습소(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5년간 공부했고, 1911년 졸업과 동시에 개성에서 외과의사로 활동했다. 2년 후 당시 개성 송도보통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던 윤치호의 권유로 이 학교에 부임해서 수학·국어·역사 등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후 1946년 6월 배화고등여학교의 교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교직생활을 했다.

일제 말기에는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 동안 〈조선교육사〉에 대한 집필구상을 했고, 출옥한 후에 완성했다. 〈조선교육사〉는 한국교육의 고전으로 인정되는 저서로서 교육사를 문화의 한 분야로 보고 시대마다의 교육제도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신채호의 민족사관과 백남운의 경제사관에서 받은 영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제까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 민중과 여성에 대한 교육을 소개하고, 전통시대의 교육에 대해서도 잡과교육으로 쳤던 기술교육을 포함시키는 등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8·15해방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교육에 관한 논설을 발표했는데, 1946년 〈건국교육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평등교육이념을 강조하여 의무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다. 학제에 대해서도 당시의 6-6-4제를 생활수준이 높은 국가에서나 실시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기초교육을 유치원 3년(4~7세), 소학교 5년(7~12세), 중학교 3년(12~15세), 고등학교 3년(15~17세), 대학교 4~5년(18세 이상)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에 참여하여 교육과 문화 부문에 관한 강령과 정책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5·10총선거 등 정치적인 변화로 인하여 1948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갔다가 평양에 남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활동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교육성 산하 보통학교국장을 역임했고,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을 거쳐 〈민주조선〉의 사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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