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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 1978.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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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구 |
문화재 |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 |
요약 황해도 은율에서 전승되던 탈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이다. 조선 후기 훨씬 이전부터 성립되기 시작해 191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주로 단오날 행해졌으며, 6마당으로 구성된 본놀이 후에는 서도잡가 등의 소리와 춤으로 어울렸다고 한다.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관계를 잘 보여준다.
유래 및 변천
조선 후기부터 은율에서 탈춤을 놀았고 각 지방의 관아에서 베풀어진 나례와 산대놀이 또는 민간놀이 등을 전제로 하면 은율탈춤의 성립은 조선 후기보다 훨씬 이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은율은 농산물이 풍부했고 일찍이 인구 증가와 상업이 발달되어 탈춤이 발달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지역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탈춤의 최고 전성기는 3·1운동 이전의 1910년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리원에서 황해도 탈춤경연대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은율탈춤이 우승했다고 한다. 이후 차츰 쇠퇴하여 1930년에는 몇몇 놀이꾼에게서 전승되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1951년 1·4후퇴 이후 놀이꾼이 인천으로 월남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놀이
은율탈춤은 여러 명절 가운데 주로 단오에 행해졌으며 읍의 인근 마을에서 탈을 만들고 연습을 했다가 단옷날 놀이꾼들이 숲에서 탈고사를 지낸 후 길놀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놀이에 들어갔다. 길놀이의 맨 앞에는 잡이들이 서고 각각 탈을 쓴 사자, 마소를 탄 양반, 팔먹중, 노승, 미얄할미, 영감, 무당순으로 읍내를 1바퀴 돈 후 놀이꾼과 관중은 아래 장에 모여 놀이를 즐겼다. 보통 어두워져서 본놀이를 시작하면 2~3시간 하고 뒤판에는 서도잡가·〈놀량사거리〉·〈양산도〉 등의 소리와 춤으로 어울렸으며 짧은 초여름밤이 새도록 놀았다. 이렇게 2, 3일 놀고 놀이가 끝나면 탈을 불태우면서 소망을 빌었다.
탈과 춤
은율탈의 바탕은 주로 흰색과 붉은색이며 둥글게 불거진 커다란 혹이 많이 붙어 있어 인상적이다. 얼굴에 붙은 혹은 매우 조형적으로 3~6개가 붙어 있으며 각각의 혹은 위에서 아래로 황색·녹색·적색·은색·흑색(마치 5방색을 연상시킴)의 선이 둘러져 있다.
춤은 염불·타령·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춘다. 굿거리장단의 변이로 보이는 돔부리장단과 돌장단을 치기도 한다. 춤사위는 봉산탈춤의 깨끼춤에 가까우나 봉산탈춤에서는 발을 바깥쪽 옆으로 제끼는 데 비해, 은율탈춤은 발을 제끼지 않고 앞쪽을 향한 채 똑바로 상하로 움직이는 것이 다르다. 주요배역에 따라 헛목춤·팔먹중춤·노승춤·영감춤·최괄이춤·미얄춤이라 부르며, 이 춤 속에는 업는사위·제끼는사위·도는사위·곱사위·올림사위·떡메사위·팔얹고걷기사위·나비걷기사위·몸찧기사위·작은찧기사위·큰찧기사위 등의 사위가 있다.
전승
은율탈춤은 1910년대 활약한 박동환·박원식·박남상·조병모, 1920년대 활동한 김태화·이은식·김상렬·김근봉·박문택, 1930년대 활동한 이돌백·이년성·장교헌·이석윤·장춘화 등이 연희했다고 하며, 1960년대 월남한 장교헌·장용수·양소운 등에 의해 복원되었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이다. 기·예능보유자에 김춘신(2015 해제)·민남순(2013 해제)·차부회(목중, 노승)·박일흥(목중, 최괄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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