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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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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3(고종 10), 서울
사망 1940
국적 일제강점기, 한국

요약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1년 경기도관찰사로 궁내부특진관을 겸했으며, 1902년 철도원부총재가 되어 경부선의 철도부설에 관여했다. 그뒤 지계아문부총재·비서원경·의정부찬성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 때 민병석과 함께 순종에게 합병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을 강요했다. 한일합병 이후 이왕직찬시가 되었고 1919년까지 장시사장을 지냈다. 중추원고문·중추원부의장을 거쳐 1938년에는 유림의 유력자로 경학원대제학 겸 명륜학원 총재가 되었다. 1939년 칙선귀족원 의원이 되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고문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부묘의식 때는 수고한 민간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하여 차비원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 물의를 일으켰다.

본관은 해평(海平).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철구(徹求)이고, 동생 택영(澤榮)이 순종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아버지이다.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후 총리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 시독관, 내부 지방국장, 법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01년 경기도관찰사로 궁내부특진관을 겸했으며, 1902년 철도원부총재가 되어 경부선의 철도부설에 관여했다.

그뒤 지계아문부총재·비서원경·의정부찬성 등을 지냈다. 1908년(융희 2) 시종원경이 되었으며, 1910년 한일합병 때에는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순종에게 합병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을 강요했다. 한일합병으로 훈1등 자작(子爵)이 되어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1919년까지 장시사장(掌侍司長)을 지냈다. 1925~40년 중추원고문을 지냈으며, 1940년 8월에는 중추원부의장이 되었다. 1938년에는 유림(儒林)의 유력자로 경학원대제학 겸 명륜학원(明倫學院) 총재가 되었다. 같은 해 총독부의 전시정책 자문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을 지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고문을 맡았다. 1939년 칙선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며, 이용구(李容九)의 아들 석규(碩圭)가 주최한 송병준(宋秉畯), 이완용(李完用), 이용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 대한 감사추모제인 '일한합병공로자 감사위령제'에 참석했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고문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부묘의식 때는 수고한 민간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하여 차비원(差備員)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 물의를 일으켰다. 아내인 김복완(金福緩)은 일제의 침략전쟁 지원과 국방비 헌납 등을 설립목적으로 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회장으로 금비녀 헌납운동 등에 앞장서는 한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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